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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gie's Blog
최동원과 이선희 본문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최동원 선수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지병 때문에) 최근에 활동을 안하셔서 그 이름을 들을 일이 없기는 했으나, 80년대말까지 그는 야구팬이라면 누구라도 가장 먼저 떠올릴 대스타였다. 지금 많은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를 라이벌로 꼽고는 한다. 프로야구 무대에서라면 틀리지 않은 비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의 이전으로 가보자. 당시 고교야구가 무척 인기가 있었지만, 야구 스타들이 즐비한 실업야구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던 시절. 친구들 끼리 늘 비교했던 최고의 투수는 최동원과 이선희였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정통파 투수 최동원, 최고의 기교파 투수 이선희. 1
최동원 선수도 사실 최고의 커브와 브레이킹 볼을 구사하는 선수였지만 그를 대표하는 것은 그 역동적인 투구동작에서 나오는 불같은 강속구였다. 최동원 선수보다 3살 위인 이선희 선수는 당시로서는 희귀한 왼손투수였는데 경북고 졸업 후 실업리그에 뛰어든 1973년 이래 실업리그 노히트노런 2회, 77년 수퍼월드컵 우승의 주역(MVP), 일본전에 강했던 '일본킬러', 78년 실업리그 3관왕 등 70년대 실업리그 최고의 투수였다. 70년대말에서 80년도로 넘어오면서 구위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언론 및 사람들에게서 최고로 회자되고는 했다. 이 때의 최동원은 연세대-실업 롯데 시절이었고 최동원의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최동원의 혹사는 연세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실 1983년 프로 롯데 입단 시기에는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이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와 친구들이 뭘 안다고 최동원 이선희를 비교했었을까?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친구들끼리 그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어른들은 77년의 수퍼월드컵 우승 당시를 비롯해 국가대표에서 우완-좌완 에이스로서 동반 활약했던 최동원과 이선희를 두고 두고 회상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이선희 선수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시 삼성라이온즈의 창단멤버이자 에이스로 활약하여 15승 7패로 다승2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최종전의 만루홈런이라는 참담한 충격으로 인해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였고 1987년을 끝으로 MBC청룡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최동원 선수보다 5살 아래인 선동열 선수는 1982년 고려대 재학시절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주역으로 대회 MVP를 수상한 이후부터 1985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986~1987년의 선동열 선수와 내리막길이었던 최동원 선수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승패로만 보자면 1승 1무 1패.
이랬던 최동원 선수. 어릴적 나와 친구들의 마음의 우상. 53세라는 아직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우리의 수퍼스타. 많이 안타깝다.
- 친구들끼리 이렇게 얘기하고 다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