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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세레나데

snowfrolic 2010. 6. 3. 13:35


여기저기 보관하고 있던 펌 글들을 한 곳에 정리함. 출처는 알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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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도라지꽃을 사들고 내 집에 왔을 때 나는 비로소 회복기에 있었다. 병의 회복이란 이상해서 약간의 염세와 희망이 함께 출렁이곤 했는데, 염세란 다분히 장식적인 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승원은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깊은 사랑이 나를 일찍 병상에서 일어서게 했던 것이다.

그녀, 혜수는 아름다운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엔 작은 무늬의 야생꽃들이 가득 넘쳐 있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았을 때 와아 흩어지듯 펄럭이곤 했다.

"언니가 완쾌되어 기뻐요." 

혜수는 내게 파라핀 종이에 싸인 도라지꽃을 내밀었다.

"고향인 진도엔 도라지꽃이 지천이었어요. 서울로 올라온 후 오빠는 늘 말씀하셨죠. 도라지꽃이 보고 싶다고...."

밤이면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는 내 남편은 그녀의 외사촌 오빠였다. 아버지를 바다에 잃은 후 그녀는 외사촌에 의해 서울에서 길러졌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채 외로운 섬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섬으로 돌아갈까 봐요."

창으로 비껴 들어오는 저녁 빛을 받으며 그녀가 말했다.

"섬에 간다구요? 여자한테는 도시생활이 좋아요. 편리하고 또 적당히 허영심이 생기고 그리고 이젠 결혼도 해야죠, 오빠도 늘 걱정이세요."

내 말에 그녀는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름다운 여자였다. 플레어 스커트로 여며진 작은 허리라든가 흰 블라우스의 섬세한 볼륨들도 그러했다. 게다가 그녀는 좋은 직장에서 유능하게 일하고 있었으며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식구들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극심한 남성기피증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녀에게서 본능적인 어떤 외로움 따위를 발견했었다.그것은 그녀가 이미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부동의 외로움이었다.

"아무 생각 말고 이제 결혼을 서두르도록 해요. 스물 아홉이란 나이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잖아요, 두 남녀가 순간적인 사랑만으로 일생을 약속하는 용기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것이에요, 우리 집안엔 여자가 적어서 고모를 이해해 주기 힘들어요,그러나 난 이해해요."
"언니가 날 이해한다구요?"

혜수는 의외라는 듯 반문하였다.

"고모는 아마도 이상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난 그런 여자들을 좋아해요. 추억이 여자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 지 알아요?"

<추억, 추억> 혜수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는 소파에 기대어 스커트 속으로 두 발을 모으며 웃었다.

"예민 하시군요. 언니. 나도 마침 그 얘길 하고 싶어요. 나도 이젠 그 집요한 추억에서 해방되고 싶어요. 추억을 정리하고 싶어요. 오래 전부터 한 남자를 사랑했었어요."

그리고 혜수는 침착하게 내게 무엇인가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한 사내를 따르고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자 그를 더 이상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생겼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분은 내가 남학생하고 얘기하는 것조차 심하게 꾸짖었어요. 나는 그것이 나중에야 애정이라는 걸 알았죠. 말하자면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도 좋았어요."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항아리에 도라지꽃을 꽂았다. 그녀의 음성은 온후했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한스럽게 들려 왔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내가 성인이 되자 그는 날 피하기 시작했어요. 날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말예요. 나는 비로소 그를 만나는 게 죄악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나 사랑은 죄악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막연하게도 나는 그녀의 고백에서 이상한 위험을 예견하였다.

"미묘하군요"

도라지꽃에서 손을 멈춘 채 내가 말했다.

"그 후 그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려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이미 20여 년 동안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애정을 길들여 놓고 있었거든요, 그가 먼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는 얼마 후 결혼도 했죠."

나는 문득 도라지꽃에서 손을 떼었다. 미묘하게도 결혼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쳤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서로 이성을 지켰다는 거예요. 서로 지켰다기보다는 그가 지켰죠. 그분에게 감사해요. 그러나 난 불행을 면치못하는 여자가 됐어요. 다시는 누군가 사랑할 수 없는 여자 말예요. 이상하게도 마음이 닫혀 버렸어요. 다시는 열릴 것 같질 않아요.... "

나는 망연자실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도리어 도라지꽃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사랑을 닫히게 한 그 사내가 누구인지 대충 알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밤이 되자 외로이 돌아갔다. 야생화가 가들 담긴 플레어 스커트 차림으로 묵묵히 돌아가 버린 것 말이다.

밤이면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는 내 남편은 늘 그랬듯이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기 전에 한 가지 물어도 돼요?"

그는 이미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제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계속 음악을 전공하지 못한 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구요. 당신은 나이트 클럽의 악단 멤버가 되려고 피아노를 배우진 않았을 거예요. 혹시 여자 때문이에요 ?"

그 말에 남편은 번쩍 눈을 뜨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여자라구? 천만에 난 게으르고 소심해서 결국 타락한 연주자가 되었을 뿐이야."



그후 오래도록 혜수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초겨울 남편과 나는 남해의 한 작은 수도원을 방문해야 했으며 그곳에서 아직도 성처녀로 남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였다. 우리 부부와 혜수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 혜수는 아주 담담한 듯 이야기를 했었고, 내 남편 승원 역시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헤어지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고 혜수 역시 미소로 답했다. 수도원을 나와서 산기슭을 돌아 나와서 남편은 나무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었다.

이제 나는 내 남편을 두 배나 더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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