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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 (Look Back, 2024) 본문
룩백 Look Back
체인소맨의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의 원작 만화를 애니화한 작품. 원작의 이야기와 연출이 워낙 좋은 탓에 1시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시 같은 영화이다.
2019년의 비극적 사건이었던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에 대한 헌정임을 쉽게 알 수 있고,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안고 사는
세상의 미술인, 창작가에게 바치는 빛나는 헌사라고 할만하다.
무엇보다 어린 중학생 고등학생이 함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 그 자체가 눈물나게 예뻤다,면 나이 든 티 내는 걸까.
김은지 시인의 시집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에 '내가 아는 시 가장 잘 쓰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은 애니와 놀랍도록 비슷한데, 시인은 주인공 후지노와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쓰는 걸까.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시 가장 잘 쓰는 사람>
그사람은,
그사람은,
그 아이는 모든 백일장에서 장원이었다
한번은 월요일 조회 시간에
교단에서 상을 받고 내려갔다가
다시 이름이 불려 올라갔다가
하나 더 받아야하니 내려가지 말라고해서
학생들도 교장 선생님도 웃었던 적이있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글 잘쓰는 학생들이 많은 고등학교였는데도,
주최 측에서도 좀 여러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을 텐데도,
도저히 그럴 수 없이 인정하는
너무 뛰어난 글
내가 하도 신기해하니까,
그 애를 잘 아는 친구가 말해 줬다
아빠가 국어 선생님이라서 그래
어릴 때부터 항상 시집을 읽는대
중학교 땐가 캠핑 갔을 때
그 애와 내가 같은 조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해 주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했다
그 애는 나에게 연세대라는 단어를 처음 알려줬다
"난 연세대 가고 싶어."
"거기가 어딘데?"
"공부 아주 잘해야 갈 수 있어"
"근데 왜 난 몰라? 안 좋은 학교 아니야?"
연세대만 보면
연세대가 과연 좋을 학교인지 궁금해했던
캠핑장 수돗가가 떠오른다
대학에 가서도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고향 떠나 대학 생할이 어떤지
시험을 다시 치는 건 어떨까 고민했던 것 같다
대구에 지하철 화재 사고가 났다
그 아이가 탄 것 같다고 했다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다 똑같지 뭐"
그 아이를 좋아했던 친구는 나중에
무언가가 다 똑같은 일이라고 했다
뭐가 똑같다는건지......
몰랐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글을 잘 쓰면
대회마다 장원일까
교지에 실린 그 아이의 시를 펄쳐보았다
'기도'라는 제목이었고
'할 말이 많아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첫 줄에 소름이 확 끼쳤다
시 잘쓰는 사람에 대한 얘기만 하면
그 아이 생각이 난다
그 아이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얼마나 까맣게 빛났는지
나는 말하지 못한다
수학을 그토록 싫어했고
언어 영역을 얼마나 잘했는지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표정을 기억하냐고
묻지 못한다
복통을 느끼면서 이미 쓴 글을 또 쓰고
몇 년 뒤에 꼭 같은 글을 쓸 뿐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한다
그 아이는
내가 아는
가장 시 잘쓰는
사람
.
후지노와 교모토가 중고생 신분으로 만화 단편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부모의 지원(?)이 컸다. 극 전체에서 둘의 부모는 코빼기도 안보여서 쟤네 고아인가 싶을 정도. 그 이전에 사회불안장애로 학교에 안나오는 교모토의 사정을 배려해주신 선생님의 마음씀씀이가 인연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고.
2024년 9월 25일 오후 4시 30분
메가박스 수원인계 1관 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