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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snowfrolic 2011. 1. 30. 17:19

MBC 드라마 "이산"이 방영 중일때 정순왕후와의 관계를 찾아보다가 발견하여 저장해 놓았던 글인데 출처를 알 수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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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은 흔히 역사상의 가정...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변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분입니다.

그만큼 뛰어난 역량.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과 죽음.... 그리고 업적을 이룩한 분입니다.

정조대왕 재위당시 조선은 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임을 자랑하고 있었고 흔히 말하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조대왕이 오랜 세월 모든이들에게 회자되며 아직도 그분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그분의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조는 잘 아시다시피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영조의 손자입니다.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았으나 동궁시절부터 수차례의 암살위협에 놓여 있었고 궁내부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담을 넘어 들어와 목숨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그의 입지는 불안하였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속에 살게된 그를 이해하려면 먼저 과거를 거스러 영조의 아버지였던 숙종때로 올라가야합니다.

숙종... 그 유명한 장희빈 사건의 중심 인물인 그는 역사속에서 제대로 주목받진 못했지만 영국의 헨리 8세에 버금갈 만큼 대단한 수완가였습니다.더불어 그 능력만큼이나 여색을 즐기신 분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숙종은 노론의 여식이었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을 총애하며 당시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숙종대왕은 장희빈과 사이에 낳은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가 원자책봉은 이르다는 핑계로 이를 늦추려하자 대노한 숙종은 이들에게 대대적인 옥사를 단행합니다.

이른바 기사환국.....

기사환국을 겪은 노론의 입장에선 장희빈은 간악한 요녀요, 소론을 비롯한 남인들은 간신이며 적신이었습니다.

허나 정치는 움직이는 파도와 같이 변하는것... 무소불위의 장희빈이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노론의 희망이었던 중전 인현왕후가 복권합니다.노론은 이를 기회로 원자인 경종을 몰아내고 소론을 제게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영민한 왕이었던 숙종은 비록 장희빈은 사사하였으나 자식인 경종을 총애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이른바 정유독대.... 

당시 노론의 거두였던 영의정 이이명을 일부러 밤에 입궐시키게 만들며 사관과 승지는 물론 내관까지 물리친채 이이명을 독대 함으로써 주위의 여론을 집중시키는 고도의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날밤 이이명의 동의하에 경종은 세자로 책봉됩니다.

장희빈의 아들이었기에 경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론이라는 당적이 붙었있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론은 기사환국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듯 했을겁니다. 노론은 정유독대가 불법적이었다는 이유로 경종을 인정 할수 없다며 병약함을 이유로 경종의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 숙빈 최씨의 아들.노론의 지지를 받음)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압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왕위를 내어 놓으라는 협박이었던 것이었습니다.역모와 다름없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노론을 향해 소론의 김일경이란 인물이 나타나 무자비한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노론에게 피바람이 불어닥칩니다.

그것이 신임사화.....

 

비록 적대관계였던 노론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이지만 경종은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굉장히 총애하였고 후사가 없던 경종은 결국 연잉군을 세자로 지목합니다.그리고 얼마후 경종은 후사없이 젊은 나이에 병석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고 연잉군, 즉 영조가 즉위합니다. 

바로 그때 역사속에 유명한 사건중 하나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납니다.(이인좌는 소론출신 무장이었다)

당시 소론은 경종이 병석에 있을때 영조가 진상한 게장을 먹고나서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보고 영조가 경종을독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영조의 어머니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전에 결혼했었던 전력(숙빈 최씨는 후궁이 되기전 궁의 잡일을보는 무수리였다. 숙종은 이런  최씨를 임신시키고 나서 후궁으로 삼았는데 당시 숙빈 최씨는 남편이 갓죽은 청산과부였다.)을 들어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난을 일으킵니다...그러나 난은 평정되었으되 여파는 컸습니다.

소론이란 소론은(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를 제외하고,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군을 지휘했다.) 모조리 주살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고 노론만이 정치를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정치의 타락은 피할수 없었으며 영조가 말하고 실행하려던 탕평책은 오히려 노론의 정치공세에 면죄부만을 주게됩니다.

요직에 남인이나 소론을 기용하려하거나 정치적 소신을 펼치려고 할때마다 노론은 "이인좌의 난때의 억울함을밝혀줄 자가 우리 노론말고 누구이겠습니까"(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다라는 주장. 영조는 평생동안 이 두가지 루머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어필절목과 영종기사를 보면 상당 부분 그런 흔적이 보인다.)라는 말로 영조를 압박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임의리 라고 말하는 노론의 정치공격이었습니다.

 

그런 영조를 보고 자란 사도세자는 노론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 영조의 흐지부지한 탕평책이 아닌 왕의 소신대로 당에 상관없이 능력위주에 정치를 펼치는... 이른바 "준론탕평"을 주장하게 됩니다.

한중록이나 영조실록에서 미치광이나 안하무인으로 표현했던 사도세자 부분이 신뢰성이 떨어지는것은 바로 이대목입니다. 어린 나이에 영조대신 대리청정을 했던 사도세자는 실무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고 인격적인 부분까지 뛰어나 심지어 노론내에서도 시파라 하여 사도세자를 인정하는 무리가 따로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허나 노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던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의 집안을 필두로 (노론의 요구로 영조는 혜경궁 홍씨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를 표현한 부분은, 혜경궁 홍씨가 노론중진의 집안이라는것과 사도세자 사후 영조가 다시는 혜경궁을 찾지 않은것, 정조가 즉위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정조의 외할아버지} 등 제사지낼 사촌 한명만 남기고 외가집 식구들을 도륙한것을 보아도 혜경궁이 분명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한것으로 보여진다.혜경궁 홍씨는 순조시절 한중록을 집필했는데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에게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보존하기 위해 한중록을 통하여 변명을 한것으로 볼수 있다. 영조실록 역시 당시 노론세력이 편찬 하였던 것으로 그 진위가 변질됐을 가능성이 크다.) 궐내의 대다수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결국 모두 다 아는대로 뒤주에서 죽게됩니다.

바로 임오화변 이었습니다. 

결국 노론이 죽음으로 이끈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존재는 노론에게 두려움이 대상이었고 정치적 제거 대상이었을겁니다.그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숙종, 영조 시절의 노력이 정조의 천재성과 조우하게 됩니다. 우선 정조는 노론의 손아귀에서 놀던 훈련도감등의 군을 재편하여 장용영을 설립하며 군의 개혁을 만들어 냅니다.(이때 만들어진 것이 무예도보통지)

또한 영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노론과 담합하며 정치자금의 근원이 된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행통공을 발표하며 세제의 개혁을 갖고옵니다.(물론 당시 남인 채재공을 영의정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노론이 물품도고현상{매점매석으로 물건의 값을올림}을 발생시키자 정조가 노론에게 정치적 제제를 가한면도 있음)

또한 조선 시대에는 경연이라하여 우수한 양반이나 중신들이 왕을 교육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정조시대에는 그성격이 바뀌어 왕이 중신들을 가르치는 제도가 되어버립니다. 호학군주로 이름높던 세종대왕과 비교했을때 세종대왕이 신하들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는것은 고작해야 한학 정도 였다고합니다. 허나 공부에 공부를 거듭해 정사에 등용된 중신들을 가르칠 정도의 정조는 성리학의 기본부터 문학, 예술, 무예 심지어 의학 등 어느하나 신하들이 따라 잡기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을정도 였다합니다. 강하고 똑똑치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어린시절의 영향도 없잖아 있기도 하겠지만, 천재라 불리던 정약용과 대등하게 학문을 논할 정도라 하니 정조 역시 천재였었나봅니다.

그리고 노론, 소론, 남인에 상관없이 우수한 젊은 인재를 등용하여 중용하는 기관, 즉 너무나 유명한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당시 노론이 규장각을 심하게 반대했었는데 그 이유는 상소를 검열하는기관인, 사간헌을 통하지않고 바로 상소를 올릴수 있는 유일한 부서였기때문입니다.당시 노론은 숙종조 이후부터 사간헌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은 바로 언론을 통제하는 역할이었기에 막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소문을 통해 탄핵이 이루어 지는 시스템속에서 규장각은 사간헌의 정치적 견제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이 규장각을 통해 정조는 왕권강화는 물론 정치의 정화를 꾀했던 것입니다.(현재로 따지면 국회와 정부처럼 견제하며 서로 감시하는 역할)

한편으로는 홍국영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력히 하다 여론의 견제를 받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홍국영을 귀양보내는 등 무서울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또한 왕권의 열렬한 지지자인 남인들 중 정약용, 채제공을 발탁하여 수원성을 쌓고,(수원성을 정조가 원한 이유는 사도세자의 능이 수원에 있었음으로 당시 사도세자의 기억을 잊지않았다는 것을 노론에게 보여주는 정치적 경고와 웅장한 능행을 통해 왕권의 존재감을 일반 백성들에 심어줌으로서 존경심을 갖게하고, 능행에 동원되는 군사들을 합법적으로 훈련시킬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수원성이 완성됨으로서 양반들의 세도권인 한양을 벗어나 군권과 민심을 등에 없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던 목적으로 보인다.) 가문은 보잘것 없지만 골수 노론이었던 김조순(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의 주역)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며 노론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정조는 당시 시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첩의 자식, 즉 서얼을 신원시켜 관직에 등용할 수있는 길을 열어주며 규장각으로 대거 기용하는 과감함을 보입니다.물론 세도가 넘쳐흐르는 노론이 당연히 첩을 많이 두고 있었기때문에 재산 배분등의 문제로 정조의 조치에 강력히 반대하게 되죠. 훗날 노비마저 신원시키려던 정조의 행보는 여기서 막히게 됩니다. 바로 영조의 계비...정순왕후가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골수 노론벽파인 김구주의 여동생이었던 정순왕후는 자신 역시 노론이라는 인식을 갖고 정조를 대했으며 내명부의 여인임에도 노론에 적이라 판단되면 왕족이라도 서슴없이 제거하는 무서운 여인이었습니다.훗날 강원도에서 나무 팔던 철종이 왕에 등극한게 된것도 정순왕후의 무자비한 도륙에 왕족이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훗날 남인출신 선비였던 이가환은 정순왕후를 "임진왜란과 맞먹는다"란 표현을 쓸 정도로 조선왕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천주교인들 대부분이 남인이었기에 천주교도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남인을 제거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덕분에 평민임에도 천주교도이기에 죽어야하는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다.) 뛰어난 왕이었던 정조도 고작 7살 차이나는 할머니지만 품계상 어른인 정순왕후를 어찌할수 없었습니다.

후에 정조대왕은 등에난 종기로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어의가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의 일가 였으며 평소 정조를 경원시 했던 정순왕후가 갑자기 나타나 용태를 살핀 후 정조가 사망하게 됨으로써 숱한 의혹을 불러 일으킵니다.

앞에서 말한 사실과, 현대에 이르러 당시 어의의 처방전을 다시 살펴본 결과 수은중독을 일으킬수 있는 재료가 다량 함유되 있었으며, 정조가 죽기전 "수정전(정순왕후의 거처)을 조심하라" 라는 말을 남긴것, 후에 노론이 얻게되는 막대한 정치적 이익을 보면 암살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인이던 사암 정약용 선생 역시 정조사후 귀양지에서 집필한 저서에서 "전언에 의하면.."이라는 전제로 정조대왕의 암살 의혹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은 전혀 드러난바가 없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관리의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백성의 피해를 막고, 균역법으로 세제를 개혁하여 비리를 쇄신하고 나라의 살림을 바르게 했으며, 신해통공을 통해 시장에 다양화를 구축하고, 신문고를 부활시킴으로서 백성의 마음을 보살폈으며, 정치적 보복을 하지않고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준론탕평"을 받들어 정치적 조화를 이룩하였으며, 군제 개편으로 군을 강성시켰고 학문의 장려로 조선조중 문맹률을 가장 낮춘 시기였으며 예술이 꽃을 피우며 김홍도나 정선같은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를 배출해 냅니다.또한 무역을 장려하여 아시아 각국의 무역상들이 그동안 닫혀있던 조선을 왕래하게 됩니다. 덕분에 젊은 인재들이 자유로이 외국을 드나들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그렇게 북학파가 탄생 하며 박지원의 "열하일기"같은 문화의 다양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숙종이 시작하여, 영조가 기틀을 다지고, 정조가 꽃피운 최고의 시대 였습니다.

 

 

PS. 기본적으로 노론, 소론, 남인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아마 학교에선  가르치지도 않을테니...

노론 : 주자학의 신봉자들로 우암 송시열을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자보다 주자를 더욱 높게 평가하며 공자의 말씀이라 전해지는 사서나 삼경보다도 주자의 역학계몽을 우선시 했을정도였습니다. 주자의 이론중 "붕당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군자는 마땅히 군자의 당을 만들어 군자의 당에 들어야한다. 비록 왕일지라도 군자가 있는 당이면 스스로 그당에 들어야한다."를 바탕으로 "사대부와 군왕에 차이는 없다"라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선조시절 당파 싸움에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주자설을 비판했던 율곡 이이의 사상이 노론의 정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와 기는 다른면서도 하나다"라는 이기일원론을 "군신간에 차이는 없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왕권보다 사대부의 신권이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론적인 성리학보다 현실정치 개혁에 초점을 두었던 노론은 처음에는 왕권의 폭정과 특정인물이나 무리에 의한 독재를 견제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으나 점차 퇴색하여 기득권을 위한 당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주자의 신봉자들이기에 중화사상에 심취하여 극심한 "사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청의 여진족 정권이 세워지자 "명,송대의 훌륭한 중화문화는 조선에만 남았다"하여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예술에서도 드러나는데, 정선의 "진경 산수화"를 으뜸으로치며 "조선이야 말로 주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마지막 땅"이라는 믿음을 보입니다.

몇번씩 말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노론인들이 왕권에 그토록 시비를 걸면서도 결국 조선후기 소론,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말라"는 이들 전략덕입니다.

산림이란 현재의  재야인사들로 공적교육기관이 없던 시절 여론을 조성하고 장래 관직에 오를 인재들을 가르치던 세력임다. 사원 같은곳이 예가 되겠죠.

국혼은 말그대로 세자빈이나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숙종조 부터, 노론은 대부분의 중전을 배출함으로써 왕권에 안전장치를 걸어두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붕당이었습니다.

흔히 잘모르는 분들이 벽파와 시파를 다르다  보시거나 시파가 소론이라고 말씀하시는 오류를 범하시던데....

위에서 말했듯이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눠지는데 벽파는 사도세자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 들이었고, 시파는 사도세자에게 감화되어 동정적이었던 온건파로 보시면 됩니다. 그외엔 다같습니다. 당이 갈리거나 다른 노선을 걷지도 않습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견해만 다른겁니다. 

(노론내에 아~~ 주 예외적이 경우가 생겨나는데 하나는 바로 홍국영이다. 혜경궁 홍씨와 같은 집안 사람이므로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노론이것만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자 노론의 후기지수로 손 꼽히던 정후겸을 비롯하여 자신의 아재비뻘인 홍인한,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노론벽파의 실세였던 김구주를 축출하는 등, 정조의 왕권강화의 1등공신이 된다. 다른하나는 바로 박지원, 박제가 로 대표되는 북학파다. 노론 세도가 출신임에도 정쟁에 회의적이며 정조의 개혁에 최대한 협조하며 외국의 선진문물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마지막은 북학의 거두였던 박제가의 제자이자 불세출의 기인이던 추사 김정희 이다. 정쟁에 휩쓸려 귀양을 갈 정도로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기인이였던 추사에겐 당쟁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윤상도의 옥사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했다. 골수 주자학파였던 노론이라면 까무러칠만한 일도 서슴없이 했는데 바로 구족계를 받고 스님이 된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노론의 산수화에 대한 견해에도 "말짱 개소리"란 태도를 취했다.  재밌는 것은 그가 7세때 "명필이 될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말을 한것은 다름아닌 당시 영의정이자 남인의 지도자였던 채재공이었다.) 

 

소론 : 원래는 노론과 함께 서인이라는 당이었으나, 노론의 기조가 된 송시열과 그 제자였던 윤증이 불화를 일으켜 남구만, 박세채 등이 윤증과 함께 따로 일으킨 붕당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노론과 정치적 노선은 비슷하나 그방법론이 다르다 하겠죠. 당시 송시열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적대관계였던 당과 손을 잡고 반대당을 완전히 몰살해버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정치수단을 썼으며 가혹할 만큼 노론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소론은 송시열의 방법이 너무나 비열하며 "붕당의 의미를 정치적 보복으로 퇴색시킨다"고 강력히 비판합니다. 더욱이 당시 정쟁에서 밀려난 남인세력을 몰살시켜야한다는 노론에 주장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해서 죽여야만 하는 것이 정치인가"라며 귀양 정도의 처분을 주장하며 끝없는 대립을 펼치게 됩니다.

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던 송시열이 남인을 몰아내기위해 부패의 상징이자 척결대상이던 훈구세력과 손을 잡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자 "사림의 정신을 잊었다"며 노론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이념적으로 노론에 가까웠던 소론이 정치적으로 남인에 가까워지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예를들면 소론이었던 박문수가 암행어사 시절 노론중진들의 부패에 분노한것 처럼 소론은 현실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원리원칙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인좌의 난 이후 거의 몰살당합니다.

소론 역시 잘 모르는 분들이 남인과 뭉뚱거려서 얘기하거나 같은걸로 아시던데 완전 다릅니다.

남인과는 이념자체가 다른고 심지어 효종, 현종 조에는 남인과 당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인 : 붕당초기부터 세력이 약했던 남인은 허목과 유성룡을 빼놓고 얘기할수 없을겁니다.

허목은 우암 송시열과 그유명한 예송논쟁을 야기시키며 남인의 세력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영남남인의 기조가되었고, 유성룡 역시 재야에 있던 남인들에게 정계의 문을 열어주는 결정적 기회를 만들며 각당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기호남인의 기조가 된 인물입니다.

남인의 이념은 정통적인 성리학으로 흔히 덕치로 표현되는 "어질고 덕이있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안정케 한다"라는 공자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요순시대로 대표되는 태평성대를 이상시 하며 퇴계 이황의 사상을 따르는데 바로 이기이원론입니다. "이와 기는 다르나 서로 의존해야한다"라는 퇴계학파 사상을 바탕으로 "군신간에 의리"를 중요시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이황의 "강력한 왕권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라는 정치이념을 펼칩니다.

후에 이황의 이사상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치적 기반의 중심이 될 정도로 뛰어난 왕권중심주의 사상입니다.

주로 보수적이고 이론가가 많은 남인세력은 인재는 많았으나 그 학자적인 기질때문인지 노론의 교활한 정치력에 무수히 죽임을 당합니다. 원래 많지않던 숫자의 남인은 정조 사후 급격히 몰락합니다. 일례로 정조사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던 정약용은 다시는 중앙정계로 돌아오지 못하며 형제모두가 사사당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남인이었던  파평윤씨 가문은 살육이라고 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이승훈 등 남인이란 남인은 모조리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들 역시 노론처럼 정치적 이념이 그림에서 드러나는데 관념산수화라고 할수 있는 전통적인 화풍을 따릅니다.

즉, 실물이 아닌 상상속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는것인데, 오랜전 성군이 다스렸던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이념적 사상이 잘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인이 당시 최고로 쳤던 인물은 강세황과 그이름도 유명한 강세황의 제자 김홍도입니다.

왕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남인의 사상은 정조 사후 그 명맥만 가까스로 유지하다 훗날 시일야 방성대곡의 장지연 선생께 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남인의 학자적 기풍이 심해져 성리학적 이론에만 치우치게 되자 민생과  실용주의적 사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로 성호 이익을 시작으로 그 제자였던 권철신, 기호남인의 지도자였던 사암 정약용 등 실사구시를 주장하는 성호학파라 불리는 이들이다. 흔히 실학파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실학파라 불리는 이들중 누구도 실학이란 표현을 쓰거나 말한 사람은 없다. 현대에 이르러 일본학자들이 붙인 표현을 편의상 사용하는것이 그대로 굳은 것이다. 성호학파의 사상은 연암 박지원을 필두로 하는 북학파의 이용후생 정신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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