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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그만 사랑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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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그만 사랑 이야기

snowfrolic 2010. 6. 4. 00:44


여기저기 보관하고 있던 펌 글들을 한 곳에 정리함. 출처는 알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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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에 앞서]

나는 이제 어떤 사랑 이야기 한가지를 시작하려고 한다. 결코 화려하지도 빼어나지도 않은,지극히 평범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짧았던 사랑의 편린들...그 깨어진 조각들을, 의식을  올리는 마음으로 하나씩하나씩 맞추어 보고자 한다. 나에겐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지나간 내 젊은 날의 회색빛 한 부분을 다시 추억 한다는 것이... 그러나,비록 망각이란 단어로 추억이 결코 잊혀질 수 없다해도, 퇴락해 버린 기억의 창고속에 깊은 상채기로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는 과거의 한 시절을 이제는 털어버리고 싶다. 그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지치고 피로하게 했던 한 원인이 되어왔음으로 인해...... 과연, 이 글이 온전히 완결될 수 있을런지는 나 자신도 의문이다.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작은 격려와 편달이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음을 믿으며, 본문에 앞서 너절한 사족같이 되어버린 이 글을 마친다......
, 이제 시작이다.

Hitel 
안중언(guru)



우연이, 가장된 필연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녀와 나의 만남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그 녀를 다시 만난 것은 지루했던, 대학에서의 첫 겨울 방학을 끝내고 2학년의  새학기가 시작된 봄으로 기억된다. 대학에 낭만이란 없다 라는 시니컬한 어조로 항상 자신이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경멸해 오던 나는 대학 일년의 거의 대부분을 술과 담배에 절어 지내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화나고 비뚤어지게 세상을 보게 만들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젊은,한 시절의 치기어린 분노였다고 치부해버리기엔 좀 더 복잡한 무언가가 내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어쨌든 그렇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만으로 가슴을 채워야 했을 중요한 한 시기를 술과 담배 연기에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만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2학년의 생활이었으니,별반 달라진 게 있을리 만무했다. 술은 여전히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고,학교 생활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을만큼 헝클어져 있었다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날 새벽까지 과음한 탓에 수업이 빡빡한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후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방이 이층에 있던 탓에 거실까지 내려가 전화를 받기가 너무 귀찮았다.안 받으면 그냥 끊겠지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웬걸,전화벨이 스무 번도 넘게 울릴때까지 끊을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짜증스런 기분으로 투덜투덜 거실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야 이 새꺄!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 줄 뻔히 알고 전화했는데 빨랑빨랑 못받아?

어떤 자식이 전화 예절이 이따윈가 싶었다. 나도 질 쏘냐.

 - X
,너 뭐야? 뭐하는 놈이길래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에 전화해서 십원 짜리 튕기고 있는 거야?
 - 킬킬킬...짜아식 성질 머리하고는. 여전하구나. 나다 임마. 승운이!
 -
, 이 자식...

녀석은 나랑 한 동네에 살고 있던 국민학교 동기녀석이었다. 군대 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가 싶었다.

 -
, 너 웬일이냐? 휴가 나왔냐?
 -
그래, 정기휴가는 아니고, 포상휴가 나왔다.
 - 얼씨구,국방부도 이제 갈 때까지 간 모양이구나. 너같은 놈이 포상휴가라니. 그거 군대 가기만하면 누구나 한 번씩은 다 나오게 되어있는 모양이지? 그런 거냐
 -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지금 나와라. 나랑 같이 좀 갈 데가 있다
 - 어디? 술이라면 이따 해나 좀 지고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은 너무 이르쟎아
 - 얌마, 술이 아니고...실은 나 지금 안선생님 계신 학교에 와 있다
 - 누구? 안선생이 누구냐
 - 이 씨이 - 넌 임마 국민학교때 담임 선생님도 잊었냐
 - 아, 그래. 그 분. 기억이 났다. 하지만 졸업한 지 8년이 넘도록 전화 연락 한번 없이 지내다가 이제와서 이게 무슨 홍두깨 소린가 싶었다.
 - 그래,기억은 나는데 갑자기 또 무슨 짓이냐? 실은 나, 어제 새벽까지 술 마셔가지고 지금 몸도 안좋고... 
 - 어쭈, 게기네? 지금 안선생님 옆에 계신데 바꿔 줄까
 - 뭐? 너 지금 학교안에 들어가 있단 말이야
 - 말하면 뭣하냐. 마침 선생님이 숙직이시라네
 - 야 이 새꺄! 휴가 나왔으면 곱게 술이나 처먹고 들어갈 일이지,  피곤한 사람 오라가라 지랄이야? 어휴 - 너 이따 보자. 부대 복귀 다 한 줄 알아라
 - 킬킬킬...열 내지 말고 빨랑 나오기나 해. 나와보면 니가 반가와 할 사람도 있을테니...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아뭏든 나와보면 알아. 빨리 와라

전화가 딸깍 끊겼다. 숙취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게 죽도록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충 눈꼽만 뗴어낸 후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 입구에서 승운이를 만났다

 - 야, 군발이! 너 죽을래? 뒈질래? 나 지금 무지 열받았다
 -
후후,짜식. 이따 들어가 보면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이유를 알테니까 성질 죽여. 좀 지나서 후회하지 말고. 가게에 가서 술이나 좀 사가자

우리는 근처 가게에서 술과 안주를 좀 사서 들고 숙직실로 향했다. 숙직실엔 방문이 닫혀 있었고 안에선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야,승운아. 안에 안선생님말고 또 누가 있냐?

녀석은 대답도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방문을 열자, 거기엔 안선생님과...그 녀가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 녀였다내 기억의 늪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부침해 있던, 그러나 한시도 사라질 수 없었던 내 첫사랑......바로 그 녀였다

그 녀를 오늘 이런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나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붙박힌듯 멍청하게 서 있었다.

 -
,왔니? 어서 올라 와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몇 분간에 걸친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후 그 녀와 난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녀는 나를 몰라보고 있었다. 승운이에게 눈짓으로 내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그 당시 내 몰골이란 게 히피족처럼 산발한 머리에, 얼굴엔 수염이 아무렇게나 터부룩했고, 군밤장수처럼 시커먼 야상을 두르고 있었으니 국민학교때의 여린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 그 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싱긋이 웃고만 있었다. 내 이름이 밝혀지고 승운이 녀석의 두서없는 설명이 있은 후에야 그 녀는 너무 놀랐다는 표정으로 다시 나를 주시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맑디맑은 두 눈으로...

그 녀는 국민학교 6학년때 나랑 짝이었다. 비록 단 일주일정도로 끝나 버리긴했지만신학기가 시작되면 의례 그러하듯, 6학년때의 반 분위기도 조금은 어색하고 산만했다. 자리도 뒤죽박죽 섞여서 아는 애들끼리 앉고, 대충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앉다보니 자리가 그 녀의 곁이었다. 초면이고 해서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 녀는 별로 게의치 않는듯이 보였다. 차분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제법 서글서글한 성격에 농담도 잘 하고 해서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녀와 짝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 녀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 녀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공부도 아주 잘했고 그림,작문등 예능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한쪽 눈에만 엷게 쌍꺼풀진 그 녀의 눈은 묘한 마력마저 느끼게 했다. 나는 그 녀가 너무 좋아져 버리고만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나서 담임 선생의 입에선 가슴 뜨끔한 얘기가 흘러 나왔다. 일주일동안 서로 얼굴도 어느 정도 익혔을테니, 이제 정식으로 자리 배정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 여학생에게 선택권을 줄테니 자기가 앉고 싶은 남학생을 고르라는 것이었다. 괜시리 머쓱한 분위기... 웅성웅성...대부분의 여학생들은 현재 자기랑 짝이 된 남학생을 골랐다. 한번 안정된 분위기를 쉽게 다시 흐트리기를 싫어하는 것이 여자의 속성이므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녀도 의례 나를 선택해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그 녀는 나를 외면한채 당시 우리반에서 제일 공부도 못하고 조금은 바보스러워 보이기 까지하는 한 아이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무안함이란... 담임은 그 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왜 그 녀가 칭찬을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녀에 대한 배신감으로 속이 무척 상했고 졸업할때까지 그 앙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녀의 그림자는 항상 내 주위를 어른거렸고 나는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그러한 감정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철부지였다. 그리고 졸업...그것으로 끝이었다. 간혹 졸업 앨범을 통해 그 녀가 추억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입시라는 커다란 족쇄에 묶여 그 녀의 존재는 내 속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을 넘어 그 녀를 다시 보게 되다니,그것도 이렇게 성숙한 처녀로 자라난 그 녀를...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
정말 너무 변했다. 못 알아 보겠어.

내 상념의 꼬리를 끊는 그 녀의 목소리. 정신을  차렸다. 그 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열쩍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너두 많이 변했는 걸,. 옛날엔 쌍꺼풀이 한쪽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양쪽에 다 생겨 있쟎아...

 -
어머, 너 그걸 어떻게 알았니?

갑자기 말문이 탁 막혔다. 내가 널 좋아했었으니까...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화제는 당연히 국민학교때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들은 잊고만 지냈던 많은 추억들을 일으켜 깨웠다. 잡다한 얘기가 오가고 밤은 깊어갔다. 돌아갈 시간이 됐다. 안선생님은 다음에라도 연락할 수 있게 전화번호나 하나씩 적어주고 가라고 했다. 내가 먼저 쓰고, 다음이 승운이, 마지막으로 그 녀에게 펜이 갔다. 그 녀는 비스듬한 자세로 글씨를 썼기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았다나는 그 녀의 미세한 펜움직임을 보고 전화번호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에 사...제발 나의 감각이 정확해 주기를 빌었다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승운이는 작은 아버지댁에 인사 드리러 가야한다며 먼저 가고 그 녀와 나 둘이만 남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그 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오늘...참 즐거웠다. 8년만에 수연이 너두 만나고...
 -
그래...
 -
우리...다시 볼 수 있겠지?
 -
글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내 가슴속에선 그 녀보다도 몇배나 더 강한 긍정의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
만나게 되어있는 인연이라면 언제고 또 다시 만나게 되겠지...
 - ......?

그 녀의 눈 속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것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버스가 왔다. 그 녀가 버스에 오르고 자리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드며 버스가 사라지는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영화속의 스톱모션처럼 크게 다가왔다가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그 날 밤, 몇 달만에 펼쳐진 나의 일기장엔 새로운, 그러나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름 하나가 쓰여졌다.

강 민 경그 녀의 이름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승운이는 복귀를 했고 나는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렇게 막무가내의 상태는 아니었다. 내 가슴속엔 잊고 지냈던 그 녀가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므로... 금요일 저녁, 나는 그 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자신이 없었다. 전화 번호가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설사 맞다해도 그 녀가 집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불쑥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면 그 녀가 응해줄 지도 의문이었다. 8년이란 세월은 아무래도 내겐 커다란 벽이었다. 딸깍 수화기 드는 소리, 여보세요...그 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까닥 삼켰다.

 -
...여보세요? 거기 민경이네 집이죠?
 -
, 전데요. 누구시죠?
 - ......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전화한 사람이 나란는 사실을 알고 그 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
여보세요? 제가 민경인데 누구세요?
 -
...수연인데...
 -
어머!

역시 짐작대로 그 녀는 당황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왕 내친 걸음이었다. 아무 일도 아닌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
잘 지냈니
 -
, 우리집 전화 번호 어떻게 알았니?
 -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밤에 자는데 산신령님이 펑- 나타나시더니 이게 민경이네 집 전화 번호이니 속히 전화하도록 하여라 그러시더라구. 그래서 전화했지.
 -
, 농담도...
 -
하하하...아니 뭐, 그냥...그냥 알게 됐어.
 -
어쨌든 너무 놀랐다. 근데 어쩐 일이니?
 -
보고 싶어서.
 -
정말?
 -
그럼, 지난 열흘이 십년처럼 느껴지던 걸.
 -
어머,황송해라...
 -
, 황송씩이나. 가문의 영광정도겠지. 하하하...

나는 좀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녀가 이렇게까지 반갑게 대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 것일까...

 -
내일 주말인데 수업없지?
 -
,?
 -
한 번 볼 수 있을까해서. 맛있는 거 사줄께.
 -
정말이야?
 -
얌마, 넌 속고만 살았냐?
 -
아니, 너무 좋아서 그러지이-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나가야겠네.

그 녀는 마치 아빠가 선물을 사들고 집으로 왔을때 좋아하는 어린 계집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나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꼼꼼히 확인시킨 후에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나자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 다 이루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괜히 목구멍으로 골골하면서 뭐가 올라오는 것 같고,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룰룰룰라라라, 나는 내일 민경이 만나러 간다...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아마 입시 준비하던 시절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근데도 왜 안 피곤할까? 이등으로 목욕탕에 입장해서 떼를 벗기고, 망나니처럼 산발해 있던 머리를 동네 미장원에 가서 거금 3,000원을 주고 깎았다. 일년을 넘게 기른 머리였는데...조금 아깝기도 했지만 그 녀를 만나러 가는 데 그게 대수랴 싶었다. 뗏국물이 줄줄 흐르는 야상도 벗어버리고 그동안 폼으로 옷장에 걸려있던 새옷을 꺼내 다시 줄을 새우고, 먼지가 일센티쯤 앉아 있던 구두도 꺼내 광을 냈다. 내가 맛선 보러가는 자린들 그렇게 정성을 쏟았을까.

모든 준비가 끝난 후,거울 속에 비쳐지는 내 모습. 짜식, 저 놈이 나구만...하긴 그동안 술에 쩔어 사느라고 너무 신경을 안썼어. 이렇게 깨끗해질 수도 있는데...- 해서 이빨 사이에 뭐 끼인 게 없나 마지막으로 확인을 한 후에 보무도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황혼녘의 서쪽 하늘이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엔 10분 정도 먼저 도착했는데 이미 그 녀가 나와 있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으니 그 녀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왜 그렇게 보냐? 뭐 묻었니,얼굴에?
 -
아니, 너 수연이 맞니?
 -
이놈이 왜 또 이래? 쑥스럽게시리.
 -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니? 지난 번에 봤던 게 너 맞는지 혼란이 막 생긴다, 지금.
 -
, 그건, 그땐 금방 자고 일어나서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갔으니까 그런 거지. 이게 원래 내 본 모습이야. 아이 참 이거, 접때 그대로 해서 나올걸 그랬나...?

무안해하는 내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그 녀는 까르르 웃었다. 천진스런 그 녀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그 녀는 탁자에 양손을 올려 턱을 괴더니, 게슴츠레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지금 모습이 그때보다 훨씬 좋아. 솔직히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땐 정말 못 봐주겠더라. 무슨 깡패처럼...
 -
? 깡패? 정말 그 정도였냐?
 -
호호호호...농담이야. 짜아식, 약해가지고 그 정도 가지고 뭘.

그 녀의 두번째 이야기는 내 말투를 흉내낸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녀는 양볼에 살포시 보조개를 띄우며 다시 말했다.

 -
그래, 오늘 나한테 뭐 사줄 꺼니?
 -
뭐 먹구 싶니?
 -
...글쎄. 뭐가 좋을까...? ...그래! 우리 핏자 먹으러 가자.
 -
핏자?
 -
, 나 오늘 핏자가 먹구 싶어.
 -
, 그래. 그러지,.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유는, 난 핏자를 전혀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1학년때 우연히 한번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쿰쿰한 치즈 냄새때문에 도저히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턴 누가 핏자 먹으러 가자고하면 저거 어느나라 엑스엑스냐고 핀잔을 주곤했다. 그런 내게 핏자라니... 하지만 어쩔 수가 있나 먹구 싶다는데. 사 줘야지우리는 제법 근사해 보이는 핏자집으로 들어가 제일 큰 핏자 하나와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이니 술로라도 배를 채울 수 밖에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꼭 박차처럼 생긴 칼로 핏자를 열등분 낸 후에 우리는 쨍하고 건배를 했다

 -
많이 먹어라.
 -
,너두 먹어.

 
근데, 채 십분도 지나지않아 정말 웃기는 사발면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꼭 핏자 못먹어 죽은 귀신 붙은 것처럼 먹으러 가자고 조르던 녀석이 열등분낸 핏자중에 딱 한등분을 먹고 나더니 더이상 못먹겠다는 거다.

 -
왜 그래? 너 좋아하는 거 아니었니?
 -
...실은 나 오늘 핏자 첨 먹어봤어.
 -
? 정말이야?
 -
,근데 생각보다 별루 맛없다. 얘들은 되게 맛있다 그러던데...
 -
아이구 두야!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탁치며 황당해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탁자에 박고 계속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 녀는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한 듯이 입을 삐죽이 내밀며 눈을 흘겼고,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더더욱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야아-,그만 웃어. 사람 무안하게.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었지만 계속 입으로 바람이 새어 나왔다.

 -
휴우-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킬킬...그래,대학 3학년이 될때까지 핏자도 한번 안 먹어보고 뭐 했냐?
 - ...
글쎄,뭘 했을까? 네가 봐도 나 너무 후진 것 같지? 패션 감각도 뒤떨어지고,내 나이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유행같은 데도 민감하지 못하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그 녀의 목소리에 어떤 자조스러운 기운이 스며 있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
,그게 아니구...
 -
아냐,위로하려들 필요 없어. 나 스스로조차도 그렇게 느끼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오죽할까. 난 정말...
 -
! 강민경! 어떤 자식이 그딴 소릴 지껄여? 누가 그래? 넌 절대 그렇지 않아. 난 여태까지 너만큼 싹싹하고 세련된 여자애들을 본 적이 없어. 패션 감각? 유행 감각? 그딴 게 다 뭐야? 머리에서 메아리소리나 울리는 애들이 들먹이는 소리 아니니? 민경이 너 그 정도밖에 안되니?

나는 자괴스러워하는 그 녀의 모습이 싫어 괜히 언성을 높였고 그 녀는 그런 나를 놀란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꼭 속마음을 들킨 것같아 열쩍어 졌다.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그 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미안해. 내가...
 -
아냐,내가 미안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괜히 소릴 쳐서. 그냥, 자신이 없어하는 네 모습이 싫어서 그랬던 것 뿐이야. 정말 미안해. ...지금 이대로가 제일 예쁘고 제일 너다워보여.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속상해하는 그런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앞으론 그러지마. 알겠니민경아.

그 녀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수연이...참 많이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그늦은 시간은 아닌데,어떻게 할래? 집으로 갈래?
 -
모처럼만에 나왔는데 오늘은 좀 즐기고 싶어. 뭐 신나는 일 없을까?
 -
늦어도 괜찮겠니?
 -
너무 늦게만 아니라면...집에다 말씀드리고 나왔걸랑.
 -
나 만난다구?
 -
, ?
 -
집에 어른들은 나 모르시쟎아?
 -
접때 선생님 뵈러갔을때 얘기, 다 말씀 드렸는 걸.
 -
근데도 허락해 주시든? 깡패 만나러 나가는 건데 말야.
 -
깡패? 어머, 후후후...얘는.

그날 밤, 우리는 미친듯이 시내를 싸돌아 다녔다....... 그 녀는 무척 즐거워했고, 그런 그 녀를 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도 있을까. 채 몇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야만 할 시간이었다.

 -
오늘, 너무 재밌었다. ...고마워, 전화해 줘서.
 -
재밌었다니까 나두 기분이 좋은데?
 -
근데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니니? 내가 좀 썼어두 되는데...
 -
남아도는 게 돈하구 시간밖에 없는 백수건달인걸 뭐.
 -
얘는,...
 -
하하,아냐. 농담이야. 가자.

버스 정류장에 섰다. 막상 그 녀를 보내려고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
집에...바래다 줄까?
 - ...
아냐. 혼자 갈께. 너두 그만 들어가.
 -
그래...
 - ......
 -
, 전화해도 되겠니?

그 녀는 대답대신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나는 그 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가라. 저기 버스 온다. 안녕.

아쉬운 밤. 그러나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는 밤이었다. 사랑은...아마도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주 전화를 하진 못했다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그 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무책임하게 그 녀의 시간을 뺏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 물론 어린시절의 얘기라곤하나 - 그 녀는 참 빼어난 수재였다. 게다가 K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에 3학년이 될때까지 단 한번도 일등 자리를 빼앗기지않을만큼 지독한 공부벌레이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의 걱정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는 항상 자신은 아직 멀었고 좀더 노력해야한다며 겸손해했다.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에 비해 더없이 커보이기만 하는 그 녀. 그러한 그 녀를 과연,내가 사랑할만한 자격이 될까...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난 너무나 깊숙히 그 녀라는 존재에 휩쓸려 있었다. 대신 편지를 자주 띄웠다. 깊어가는 내 속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몇 통의 편지후에 처음으로 보내온 그 녀의 답장을 나는 몇십 번을 읽고 또 읽고 했는지 모른다.

   -
가까스로 리포트를 끝내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책상에 앉은 시각이 벌써 새벽. 피곤하고 졸립지만 몇통의
    
편지를 보내고도 아직까지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툴툴거릴
    
수연이의 모습이 떠올라 그냥 잠들 수가 없었어. 답장이 늦
    
어져 정말 미안해. 그동안 너무 바쁘고 힘들었어. 난 어쩌면
    
영원히 이 공부라고하는 벽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지도 모
    
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피곤한 하루하루지만 수연이의 재미있는 편지 한통이 내겐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어. 정말 고마워...
    
글솜씨가 없어서 너처럼 장문의 편지를 보내지 못해 미안해.
    
다음번엔 좀더 길게 써보도록 노력할께. 이제 눈좀 붙여야할
    
것 같애. 너무 피곤해...자주 볼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안녕. 건강해야 해.                
                                                                     ...
민경이가 -

편지지 한장 분량의 짧은 편지였지만 내겐 충분했다나도 네가 너무 보고싶단다, 민경아... 사랑이란, 헤어지면 못견디게 그립고 가까이 있으면 더욱더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라 했던가. 나의 그 녀에 대한 그리움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완연한 봄이 무르익었다. 축제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 녀와 나는 이십 여통의 편지와 여덟 번의 전화 통화와 세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는 단 한번도 나의 속마음을 그 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 녀는 마치 빗장이 걸려있지 않은 새장 속의 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의 자그마한 실수하나로 영영 잃어 버릴 것만 같은...

마침내 기회가 왔다그 녀 학교의 축제 기간. 그 녀와 만날 약속을 했다아침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차 좀 쓰겠다고 집에 말씀드린후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 녀의 학교 앞. 정문을 약간 비켜선 자리에 그 녀가 작은 우산에 몸을 가린채 비를 긋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그 녀의 앞에 댔다. 창문을 열고 그 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녀는 약간 놀란듯 했지만 이내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차에 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차를 몰았다.

 - ...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니?

그 녀가 말했다. 나는 그 녀를 보고 살짝 웃음을 지으며 카오디오에 테잎을 꽂았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란 노래...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창밖의 풍경과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 녀는 음악에 심취된듯 고개를 젖혀 시트에 묻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차는 시외로 빠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 녀에게 자연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내 마음까지도 함께... XX산장은 비가 오는 탓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차를 주차시킨후 그 녀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가 창가쪽으로 자리를 잡은 뒤 나는 담배를 한대 피워물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여기 어때? 와 본 적 있니?
 -
아니, 근데 너무 좋다. 차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이렇게 근사한 데가 있는 줄은  몰랐다. 수연이 너, 자주 왔던 모양이구나.
 -
아니, 자주는 아니고 친구들이랑 가끔 들르곤 해. 기분이 좀 우울하다거나 속이 답답하거나 할때.
 -
친구 누구? 혹시, 여자 데리구 온 건 아니구?
 -
, 들켰다. 네가 열 여섯번째란 거 벌써 눈치 챘니?
 -
-

 
그 녀는 눈을 살짝 흘기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
비내리는 바깥 풍경이 너무 멋있어.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애.
 -
, 그동안 너무 찌들렸나 보다. 오늘은 다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 젖어 . 기분이 참 상쾌해지는 것 같지 않니?
 -
, 그래...

창밖으로 산새 한쌍이 하늘에 금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그 녀와 나는 그 그림의 관람자가 되어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옅은 칵테일을 한잔씩 했다. 그러는 사이 해는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다. 테이블위에 분홍빛의 잔잔한 조명이 켜지고 음악도 조용한 경음악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여러가지 얘기를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공부 이야기...정작 내가 하고싶은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만 맴돌고 있었다. 답답했다. 계속 애궃은 담배만 죽여댔다. 그 녀가 무슨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그 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민경아.
 -
?
 -
...나 어떻게 생각하니?
 -
? ...글쎄? , 괜찮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편지도 잘 쓰고편안하고...시집간 우리 언니 말이 남자가 편안하게 느껴지면 위험신호라고 하던데. 후후...모르겠어, 근데 갑자기 왜?
 -
, 나한테 시집 올래?
 -
? 씨이, 너 또 농담하려고 그러는 거지?
 -
농담처럼 들리니?
 -
그럼, 아니니? , 우리가 지금 나이가 얼마나 먹었다고 벌써...
 -
그러니까 나 학교 졸업하고 나서 말야.
 -
어머, 얘 좀 봐 점점..., 너 내가 내년이면 몇 학년인줄 아니? 4학년이야. 4학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지? 불독이라구...한번 물면 절대 안놓는다쟎아. 너 그러다 정말 내가 네 발목 꽉 물어버리면 어떡하려구 그래? 그래두 돼?
 -
매일 발목 씻어놓고 기다리지, . 이제나 물어주려나, 저제나 물어 주려나하면서 말야.
 -
쿡쿡쿡...

진지해야 될 분위기가 점점 내 의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그 녀가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안심이 됐다. 나는 처음부터 농담으로 꺼낸 얘기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너 나한테 시집와라. 너 공부하는 거 힘들다 그랬쟎아. 내가 편안하게 해 줄께.
 -
자꾸 그러지마...수연아. 여잔 말야, 농담이라도 자꾸 그런 말을 들으면 진짜 그런 걸루 착각하게 돼. 혼란이 온단 말야.
 -
그래? - 그러면 나 이제부터 매일 이 얘길 입에 달고 다녀야겠다.  일년정도 들으면 완전히 쇄뇌당할 것 아냐?
 -
몰라 -

그 녀는 삐친 시늉을 하며 손으로 귀를 막고 도리질 쳤다. 그런 모습 하나 하나가 내겐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결심했다. 널 결코 놓치지않을 거라고......

산장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다. 다시 그 녀를 태운후 핸들을 그 녀의 집으로 돌렸다. 차가 시내로 들어서자 그 녀가 말했다.

 -
, 너무 아쉽다. 그렇게 좋은 곳을 지척에 두고 또 이렇게 콘크리트 벽 속으로 돌아와야 하다니...
 -
그렇게 아쉬우면 다시 돌아갈까? 아예 거기서 살아버릴까?
 -
정말...그랬으면 좋겠다.

그 녀는 정말 아쉬운듯 했다. 갑자기 그 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쳤으면 저럴까 싶었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둔채 차는 그 녀의 동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그 녀를 집으로 바래다준 것은. 동네 어귀에서 차를 세웠다. 그 녀가 내리고 나도 따라 내렸다

 -
오늘 너무 고마웠어. 난 네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넌 매번... 나는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아무 말도 하지말라는 시늉을 했다.
 -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그런 얘기...싫다. 내 곁에 네가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넌 무엇보다 큰 선물을 내게 주고 있는 거야...

그 녀는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정말이지 미치도록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 녀가 그 미소를 조금만 더 오래 끌었더라도 난 참지 못했을지 몰랐다

 -
잘 가. 빗길 조심하고...

그 녀는 조용히 돌아섰다. 아쉽게 그 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녀에게 해야할 진짜 중요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
민경아...!

그 녀가 고개를 돌렸다.

 -
..., 정말 널 사랑해!

사랑해...사랑해...사랑해...그 말이 내 가슴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날때까지 그 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녀의 말처럼 그 녀에게 혼란을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그 녀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내 이기심을 채우는 건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모를 일이었다. 답답하기만 했다. 혼란은 내게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주말 저녁이었다.

나는 내 방에 누워 멍하게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골이 텅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
수현아, 전화 좀 받아라!

...녀석 친구들이랑 영화보러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나는 힘겹게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거기 수연이네 집이죠?
 -
,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
수연이니? , 민경이...
 -
...?

그 녀였다. 의외였다. 그 녀가 우리집으로 전화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잊고 있었다

 -
네가 어떻게...?
 -
한가지...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 했어.
 -
뭔데?
 -
발목...씻어놨니?
 - ......?
 -
오늘, 난 네 발목을 물꺼야...
 -
! 너 지금 거기 어디니......?

하느님, 하느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이십니다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가는내내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듯이 온몸이 찌릿찌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녀가 마침내 내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날으는 걸음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했을때, 그 녀는 한 구석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민경아...

그 녀가 흠칫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부끄러운 듯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
...지금 발목 깨끗이 씻고 달려오는 길이다. 전화로 한 얘기, 사실이니?

 
그 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난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그 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 표정엔 애정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
그날...수연이를 보내고 난 밤새 한잠도 잘 수가 없었어. 며칠동안 공부도 제대로 안되고, 네 얼굴만 떠오르고 네가 한 얘기만 머리속에서 뱅뱅 돌았어. 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어...친한 친구가 있는데만나서 다 얘기를 했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너 혹시 그 사람 좋아하는 것 아니니? 하고 얘기하는 거야. 대답할 수가 없었어. 집으로 돌아와 여태껏 수연이가 보내준 편지를 한장한장 다시 읽어보았어. 그랬더니 편지 한통에 꼭 한두마디 정도는 내가 왜 그러는지에 대한 해답이 적혀 있었어. ...아마 수연이 네게서 편지를 받기 시작하던 그때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나봐... 

얘기를 마치고 부끄럽게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 녀를 나는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고 싶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가식없이 깨끗한 여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
민경아...

나는 그 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 녀의 손을 통해 사랑의 교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두려워. 이렇게 너무 갑자기 수연이에게 빠져드는 나 자신이  너무 두렵고 불안해...
 -
불안해할 필요없어. 그냥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그렇게 움직이면 되는 거야. 내가 널 지켜 줄께.
 -
, 수연이의 마음이 그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바람같은 감정이 아닐까 그게 두려운 거야...아니지? 그러지 않을 거지?
 -
난 네가 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널 사랑할 거야. 진심이야...
 -
고마워...고마워, 정말...

그 녀는 내게 쥐어져있던 손을 풀어서 반대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희대의 문인들은 이때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했던가. 평새을 살고도 사랑에 대해 쓸 것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헛산 것이라는 그 말은 에누리없는 진실일 것 같았다.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뻤다는 말이외엔 좀더 근사한 단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내가 그 녀를 사랑하고 그 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 가슴벅찬 사실앞에서 말이다... 

그 날 밤, 처음으로 그 녀의 집앞까지 그 녀를 바래다줄 수 있었다.

 -
민경아. 잘 자. 내가 내일 다시 전화 할께.
 -
, 조심해서 가.

나는 그 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녀는 약간 놀라는듯 했지만 곧 그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퍼졌다.

 -
- 입술에다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네. 안녕! 내 꿈 꿔야 돼?

사랑을 할땐 왜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하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었다. 나는 그말이 참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날밤 내가 꼭 그랬으니까...



나의 생활패턴은 완전히 바뀌었다. 수업만 마치면 마치 출근부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술집으로 향하던 내가 이제는 그 녀에게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그 녀 학교의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고,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엔 학교앞 커피숖같은데서 몇시간을 죽치기도 했다. 그 녀에게 당구도 가르쳐 주고 볼링도 치고 주말같은 땐 야외로 드라이브도 했다. 그 녀는 무척 행복해했고, 나는 그보다 몇배 더 행복했다. 간혹, 그 녀는 이런 말을 하곤했다.

 -
나 가끔씩 꿈속에서 수연이가 어디 멀리고 달아나 버리는 꿈을 꾸곤해내가 아무리 발부둥쳐도 그냥 웃기만할 뿐 자꾸 멀어져만 가는 거야. 그런 꿈을 꾸고나면 새벽에 혼자 일어나 울기도 해...나 버리지 않을 거지언제나 나랑 같이 있어줄 거지?

그럴 때면 나는 그 녀의 손을 꼭 쥐고 가만히 웃어주곤 했다....항상 불안한 건 나야...어떻게 내가 널 떠날 수 있겠니... 그렇게, 행복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그날도 변함없이 그 녀와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하고 들떠있던 차에 친구녀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이 누나 결혼식인데 별다른 일이 없으면 와서 잔치 손님들 시중 좀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꽤 절친한 친구였고 그 누나도 잘 알고 지내던 터라, 두말않고 승락을 했다. 민경이와의 약속 시간은 오후였기때문에 충분히 시간안에 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평소엔 잘 몰랐는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친구의 누나는 무척 아름다왔다. 저 드레스를 민경이가 입으면 훨씬 더 이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우리는 바빠졌다. 술 좀 더가져오라는 사람, 안주 더 내어놓으라는 사람, 떡 좀 싸달라는 아주머니...시쳇말로 X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밥 한그릇 챙겨먹을 시간도 없이 식사시간 내내 시중을 들어야했다. 겨우 손님들이 잠잠해지고 피김치가 된 친구녀석과 나는 늦은 점심을 한 술 뜨려고 자리에 앉았다.

 -
, 이제 좀 살 것 같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왔담?
 -
그러게 말야. 수연아 미안하다. 괜히 오라그래서 고생만 시키고...
 -
짜식, 별 소릴 다 하네. 당연히 와서 해야 되는 일인데, .
 -
그래두...
 -
됐어, 임마. 빨리 밥이나 먹자. 배 고파 죽겠다.
 -
그래, 먹자. 어휴, 벌써 시간이 4시가 다 되어가네?
 -
?

순간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 녀와의 약속 시간이 벌써 1시간 가까이나 지나 있었던 것이다. 너무 바쁜 통에 그 녀와의 약속을 깜박 잊어 버리고만 것이었다. 나는 숫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
, 수연아. 밥 먹다 말고 어디가니?
 -
미안, 약속이 있는 걸 깜박했어! 다음에 얘기해 줄께, 간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로 간다해도 예식장이 변두리에  있었기때문에 시간이 꽤 많이 걸릴듯 싶었다. 게다가 주말 오후의 러쉬아워였다.

 -
아저씨, OO극장까지 15분내로 뽑아주실 수 있어요? 따블 드릴께요.
 -
하하, 뭐 굉장히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죠?
 -
, ...
 -
어디, 한번 해 봅시다.

베테랑 기사였다. 그냥 갔으면 족히 30분은 걸릴 거리를, 웬만한 신호는 무시해버리고 차선도 귀신처럼 변경해가며 정확히 17분만에 나를 내려 주었다. 요금을 지불하고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때 내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서서 그 녀를 찾았다. 그 녀가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 녀는 이층의 구석진 한 자리에 앉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 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인기척을 느꼈을텐데도 그 녀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입을 열려다가 테이블위에 무슨 수첩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거기엔 그 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다.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 얼마나 나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으면... 그것은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라는 시였다.

 -
, 민경아...

하지만 나는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드는 그 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엔 나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
...
 -
내가...얼마나 걱정했는줄...아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사고라도 났으면...어떡하지...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혼자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근데 넌......전화 한 통 정돈 해줄 수 있었쟎아...난 정말...흐흑...
 -
, 그건...
 -
부탁이야......기다리게 하지마...난 두렵단 말야...
 -
민경아...

나는 정말 나쁜 놈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의 가슴을 그토록 아프게 하다니. 나는 손수건으로 그 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
민경아. 이제 다시는 널 기다리게 하지 않을께...정말이야. 그만 그쳐화장 다 지워지쟎아...그럼 이쁜 얼굴이 미워보여...

그제서야 그 녀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치며 살며시 웃었다.

 -
에게,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에 털난다 그러던데...
 -
아이-...
 -
하하하...

그 녀는 다시 화장을 고치고 나는 그런 그 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름다왔다. 그 녀를 위해서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
민경아, 잠시만 여기 있을래?
 -
? 어디 가려구?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는 레스토랑을 나와서 장미 스물 한 송이와 향수 한병과 장미가 그려진 예쁜 손수건 한장을 샀다. 사온 물건들을 그 녀에게  내밀자 그 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어머, 이게 뭐니? 웬 장미야? 향수도 있고..,
 -
, 작년에 성년식도 제대로 못치렀지? 이렇게 선물하는 게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뭏든 한해 늦춘 거라고 생각해.

그 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자의 가장 행복한 표정이 저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 녀는 장미 향기를 한껏 들이키더니 내게 말했다.

 -
고마워...나 또 눈물이 나려고 해...

그 녀의 얼굴엔 기쁨이 잔잔히 번져 나갔다. 나는 그 녀의 그러한 행복해 하는 모습이 제일 좋았다.

 -
, 오늘은 내가 민경이를 기다리게 한 죄로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 줄께. 뭘 하고 싶니?
 -
...오늘 술이 마시고 싶어...



그 녀가 취했다맥주를 세병 정도 연거푸 마시고, 2차로 소주 마시러 가자고 버럭버럭 우기더니 결국엔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취해 버렸다. 그 녀는 의자에 고개를 파묻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 녀의 곁으로 가서 그 녀를 흔들었다

 -
민경아! 민경아, 정신 차려. 괜찮니?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그렇게 마셔대니? 괜찮아?

그 녀는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 보았다.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그 녀는 아무 말도 않고 머리를 슬며시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 녀의 체온과 입김이 옷 한꺼풀을 통해 뜨겁게 전해져 왔다. 나는 심장이 마구 쿵쾅 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술집에서 그 녀를 데리고 나와 약을 사 먹이고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그 녀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중앙 도서관 입구쪽으로 나있는 벤치로 그 녀를 데리고 갔다. 그 녀를 자리에 앉히고 자세를 편하게 만들어준 후, 나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다. 낭패였다. 이렇게까지 취해버리다니.

 -
...연아...

그 녀가 나를 불렀다.

 -
그래, 민경아. 나 여기 있어. 정신이 좀 드니? 빨리 정신 차려. 집에 가야지. 늦었다.
 - ......

그 녀가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졌다. 그 녀의 눈빛에서 어떤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순간 내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거친 욕망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것은 죄악이었다. 나는 그 녀의 자세를 바르게 고쳐주고 다시 말했다.

 -
민경아, 이제 정신 들었지? 술 취한 모습을 집안 어른들께 보여드릴 순 없쟎아? 그만 일어서라, 가자.
 -
...오늘 너랑...같이 있으면...안될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녀가 지금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속에서 감정이 이성을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만일 이대로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 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될 것이 틀림없었다.

 -
안돼. 집으로 가. 너 지금 취했어.
 -
...취하지 않았어...정신은 말짱해...오늘...집에 가기...싫어...
 -
너 왜 이러니? 정신차려!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힘들어져. 가자,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거야.
 -
싫어! 가지 않을...거야. ......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택시를 잡은후 그 녀를 안아 강제로 택시에 태웠다. 그 녀가 몸부림을 쳤지만 기운이 실려있진 않았다

 -
싫어...가기...싫단 말야...

택시 기사가 이상하다는듯 계속 뒤를 힐끔힐끔 돌아 보았다. 나는 얼굴이 후끈거렸다차가 그 녀의 집 근처에 서고 나는 그 녀를 부축해 내렸다. 이제 그 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
피곤하지? 저기 가서 술 좀 더 깨고 갈까?

나는 그 녀를 동네 놀이터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 녀는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따랐다.

 -
어때? 이제 정신이 좀 들었니? , 너 이제 다시는 나더러 술마시러 가자고 그러지 마라. 질렸다. 무슨 여자애가 주정이 그리 심하냐? 짜식하하하...

그 녀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수연아...정말...고마워...
 -
그래, 임마. 너 정말 고마와해야 된다. 세상에 나처럼 이렇게 자상한 오라버니가 어딨냐? 난 정말 메너 빼면 껍데기라니깐...
 -
...지켜주려고 한...네 마음...잘 알아...넌 정말...
 - ......!

그 녀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나를 껴안았다. 그 녀의 머리칼에선 어린아이의 피부에서 맡을 수 있는 싸아한 비누 냄새가 났다. 내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 녀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감고있는 그 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입을 맞추었다알싸한, 감미로운, 아니면 황홀하다고 했던가입맞춤의 느낌을 표현해낸 그 수많은 어휘들중 단 하나도 내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그리고 언제까지나 널 지켜주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P.S)
미력한 저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시고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주신 CONTEST란의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내 주신 메일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제겐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일일이 답장해 드리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이텔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 새벽녁으로 국한되어있는 탓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힘드나마 거의 매일 한편 꼴의 글을 올리는 강행군(?)을 해왔습니다만 송구스럽게도 제 일신상의 문제로 이번 9편을 끝으로 잠시동안 소설 연재를 중단해야할 일이 좀 생겼습니다. 거듭 죄송스러운 말씀 드립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곧바로 다시 여러분들을 찾아뵐 것을 꼭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릴 것으로는 사료되지않는 바, 그동안이라도 여러분들이 저를 잊어버리시지나 않았으면하는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guru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어느새 여름이 다가왔다이제 나는 그 녀가 없이는  잠시도 세상을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녀는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 녀를 빼버리고난 내 인생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했고, 만나지 못할때는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
민경아, 너 맨날 나 만나느라고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그래서  어떡하니? 나 너한테 꼭 죄 짓는 기분이다.
 -
, 이제 수연이 만나지 못하면 공부고 뭐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걸. 하지만 난 절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냥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해. 그리고 행복하구...
 -
자식...

그래, 그 녀의 말이 맞았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않고 멍하고, 바보스런 상태로 있는 것이 가장 그 본업에 몰두하고 있는 거라지 않던가. 내가 그랬다.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바보였다가끔,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않고 오랜동안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있기도 했다. 눈으로 말해요...천박한 유행가 가사로만 여겼던 그 말이 내겐 너무도 자연스럽고 따뜻한 현실이 되어 있었다. 잔잔한 눈빛으로 그 녀가 묻는다.

 -
뭘 생각해?
 -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무언가를 생각했지.
 -
그게 뭔데?
 -
바로 너야...
 - ......!

그럴때, 그 녀의 얼굴 전체에 환히 퍼져가는 그 기쁨이란... 그래, 그 녀의 존재를 어떻게 물질적인 가치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녀는 이제 나의 전부였다하지만... 이미 그 녀와 나의 이별의 전주는 시작되고 있었음을...... 

여름이 절정에 달해가던 7월의 어느 아침이었다방학 게으름을 피우느라 느지막히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냉장고에서물을 꺼내 마시다가 식탁위에 무슨 쪽지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무심히 집어들다가 하마터면 물병을 깨버릴뻔 했다그것은 나의 입영통지서였다! 입영날짜는 8 1. 채 열흘도 남지않은 시간이었다나는 황급히 어머니 가게로 전화를 돌렸다.

 -
어머니, 식탁위에 놓여있는 제 입영통지서 말예요. 이거 언제 온 거예요? 오늘 온 거예요?
 -
, 그거 어제왔더라. 어젯밤에 보여주려고 했는데, 너 늦게 들어왔지 않니? 근데 입대 날짜가 8 1일로 되어있는 것 같던데...어떡하니, 이제 한 열흘 남았니...?

전화를 끊고 나자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이었다. 분명히 12월은 되어야 입대할 수 있을 거라고 병무청에 확인 전화까지 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나는 골이 멍해졌다. 갖가지 상념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엉망진창이었다열흘이었다. 이제 열흘만 있으면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부모님, 동생,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내 연인을 두고 낯선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나는 우선 민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중이었다. 다시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 녀는 집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가장 우선적을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휴학계부터 내어야만 했다. 시간이 없었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학교로 뛰었다. 휴학원서를 얻어 각 과목의 담당교수를 일일이 다 찾아 다니며 직인을 받았다. 학교에 안 계신 분들은 집에까지 찾아갔다. 일을 마무리 짓고나니 꼬박 하루가 지나버렸다저녁에 다시 민경이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 녀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집에 일찍 들어갔다부모님들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나를 맞이했다.

 -
,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다녀와야할 일인데요, . 걱정하지 마세요. 휴학계는 내일 학교에 가져다내면 되구요오후쯤 친척들께 인사 드리러 가겠습니다. 한 며칠 바람 쐬고 돌아올 여유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걱정 안하셔두 돼요...

나는 이제 거의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문제는 그 녀였다. 그 녀는 어떻게 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일런지...새벽이 될때까지 그 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친척들집을 돌면서 인사를 드리고 나니 또 하루가 그냥 지나버렸다저녁에 민경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 녀의 어머니 입에선 기운을 쭉 빠지게 하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민경이, 오늘 오후에 서울에 있는 자기 언니집에 갔는데...아마 한 일주일정도는 있어야 내려올텐데...

집으로 전화를 했다.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
수현아, 난데...혹시 나한테 전화온 거 없었니?
 -
, 오후 세시쯤에 어떤 누나한테서 전화왔었어. 이름이 뭐라더라? ...뭐라고 하던데. 없다니까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전화한다고 하던데?
 -
, 영장 나왔다는 얘기 안했니?
 -
, 안했어.

이런 제길...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 녀를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질 판국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정말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
오랜만에 뵙게 되는 것 같군요. 뭐 실제론 그리 오래도 아닙니다만, 제 마음이 그래서 그런가요무슨 일인가 걱정해 주셔서들, 다시금 송구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소설을 연재할 수 있게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매일밤, 한 잔 알콜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작업에 임해낼 수 없을만큼,아직까지 가슴속의 상채기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글이라 제겐 무척이나 힘겨운 일 임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재떨이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와 반 쯤 비워진 소주병을 보며 괜시리 서글픈 상념에 젖기도합니다.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여러분들의 애정어린 관심이 없었다면,전 지금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못했을 것입니다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조언, 부탁드립니다너무 힘에 겨운 일이군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 guru



밤에, 친구 은섭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멋진 껀수가 있는데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도 너처럼 속이 편했으면...

 -
, 영장 받았다. 8 1일에 입대야...
 -
? 이 자식, 왜 진작 얘기 안 했냐?
 -
어제 받았어.
 -
그래? 어떻게 그렇게 됐냐? 채 열흘도 안 남기고...
 -
글쎄...
 -
, 나와라. 한 잔 해야지. 얘들은 내가 모을께.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내 민경이 생각만 했다. 친구 녀석들은 군대 가는 게 그렇게 심란하냐며 위로를 했지만 모르는 소리였다. 너희들이 내 답답한 속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니...

다음날 다시 민경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내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꼈던지 그 녀의 어머니는 그 녀가 갑자기 서울로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일년 전에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던 그 녀의 바로 위 언니가 이번에 출산을 했는데 산모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니가 거동이 좀 좋아질 때까지 한 일주일쯤 수발을 들어주고 내려올 예정이라는 것이다나는 사정을 해서 서울 전화 번호를 알아 냈다

 - ...
하지만 전화해도 집에 사람이 있을 지 의문이네. 작은 애가 아직 병원에 있거든요...
 
그 녀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삼십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하느님, 이게 대체 무슨 속셈이란 말입니까... 또 하루가 흘렀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그 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서울에 전화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뚜뚜- 하는 신호음만 갈뿐 사람은 없었다그렇게 사흘이 더 흘렀다. 나는 이제 거의 포기상태였다.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채 방안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어내려 갔다

, 민경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와 울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
집으로 전화했었니? 좀전에 집에 전화했었는데 엄마가 그러더라. 미안해 너무 갑자기 올라오게 되는 바람에...언니가 초산이라 그런지 아직 잘 못 움직여. 한 며칠 더 있어야할 것 같애. 별일 없지? 계속 전화왔었다고 그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우리 조카 너무 이쁘다? 딸인데 엄마보다 날 더 닮았다고 그러는 거 있지?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말야, 키키...

그 녀는 아무 것도 모른채 즐거운듯 계속 조잘거렸다.

 -
그래, 넌 좀 어떠니? 피곤하진 않니?
 -
, 난 괜찮아.
 -
다행이구나...
 -
근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목소리에 기운이 없는 것 같다.
 -
,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
그렇담 안심이지만......보구 싶니?
 -
그래, 너무...
 -
나두...조금만 기다려. 곧 내려갈께. 그럼, 그만 끊을께.
 -
잠깐, 민경아! 잠깐만 기다려.
 -
?
 -
...지금 서울로 올라갈까?
 -
어머, ? 무슨 볼일 있어?
 -
아냐...그냥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
킥킥, 얘는. 며칠만 있으면 볼건데  뭐하러 차비 들여서 올라오니그리구 와도 널 오래 볼 수가 없어.
 -
잠시만...잠시만이라도 보고싶어. 그렇지않음 나 이대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
 -
하여튼 고집하곤, ...알았어. 알아서 해.

그렇게 병원 위치와 전화 번호를 확인한 후 전화를 끊었다. 전화상으론 도저히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가게롤 전화해 한 이틀쯤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린후,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그 녀의 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하니 어느듯 해가 저물고 있었다. 병원앞에서 전화를 했다. 그 녀가 받았다.

 - ...수연이야.
 -
어머, 정말 왔네. 거기 어디니?
 -
병원앞 공중 전화.
 -
잠깐만 기다려. 곧 내려 갈께...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한가치 꺼냈다. 병원앞 계단에 앉아 몇모금쯤 태우자 그 녀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불을 끄고 일어섰다.

 -
수연아...
 - ......

그 녀의 저 티없이 맑은 웃음을 이제 못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왈칵 울음이 쏟아지려고 했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오려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
지금 막 도착한 거야?
 -
그래...
 -
어머,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며칠 못본 사이에 너무 수척해진 것 같애.
 -
괜찮아. 밥을 제대로 안먹어서 그렇지, .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이상해...
 -
일은 무슨, 그냥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차 한잔 할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녀는 연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의문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근처 커피숖에 자리를 잡을때까지 그 녀는 계속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냥 너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
무슨 얘기?
 -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얘기.
 -
치이- 난 또.
 -
넌 날 사랑하지 않니?
 -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알아? 그냥, 느낌으로...기분으로...뭐 그렇게 아는 거지.

그래, 기분으로, 느낌으로...하지만 민경아 넌 지금의 내 기분은 알지 못하겠지...답답하고 착잡한 내 이 심정을. 자리를 일어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병원 입구에서 그 녀가 말했다.

 -
잠자린 어떻게 할 거니?
 -
근처 여관 아무데서나 자지, . 신경 쓰지마.
 -
내일은?
 -
내일은...너랑 같이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갔으면 좋겠는데, 전혀 시간을 낼 수가 없는 거니?
 -
글쎄...언니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한번 물어 볼께. 낼 아침에 전화 한번 줘봐.
 -
그래...그만 들어가봐.
 -
, 더운데 여관에 에어컨같은 거 나오나 모르겠네...
 -
내 걱정은 하지마. 잘 자.

그 녀를 보낸 후 나는 근처의 한 작은 여관에 들었다. 몸은 몹시 무거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녀에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이대로 그냥 떠나가 버린다면 어쩜 영영 그 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그 녀도 현실은 현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 , 그러나... 밤새도록 잠이 들지 못하고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침에 병원으로 전화를 넣었다. 그 녀는 언니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 되어서 오늘 하루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나는 이제 그 녀와 함께 할 수 있는 나의 마지막 이 하루를 10년처럼 보내야 한다. 그 녀를 데리고,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서울에서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내겐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녀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나의 가슴은 점점 답답해져 갔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어떤 이는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진다지만 내겐 그날 하루가 마치 반나절 정도로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내 생애에 할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적은 없었다. 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점점 길게 늘어뜨려가고 있었다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그 녀가 말했다.

 -
, 오늘 정말 너무너무 재밌었다. 나 수연이 네가 서울 지리를 그렇게 많이 알고있는 줄 몰랐다. 하긴, 워낙에 많이 싸돌아다니니까, 쿡쿡...
 -
배 고프지?
 -
, 나 무지 배고파. 빨리 저녁 먹자.

저녁을 주문한 후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
수연이, 너 담배 좀 끊어라. 아님, 좀 줄이든지...오늘도 벌써 한갑은 넘게 피운 것 같아.
 - ...
이렇게 마음놓고 피우는 것도 이제 이게 마지막일텐데, ...
 -
그게 무슨 얘기야?
 -
, 아냐. 일단 저녁부터 먹자.

그 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녀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아주 맛있게 저녁을 먹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입안이 마치 소태를 씹고 있는 것 같아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그래, 이제는 정말 얘기를 해야 한다. 시간을 끈다고 나아질 건 아무 것도 없다.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 녀를 바라보았다. 천진스레 저녁을 먹고 있는 그 녀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 아이를 두고 어떻게...
 
그 녀가 식사를 마쳤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그릇을 치우게 한뒤 디저트를 주문했다.

 - 수연이, 너 정말 어디 아픈 것 아니니? 저녁도 통 못먹고, 계속 담배만 피우고...그러고 보니까 오늘 하루내내 그랬던 것 같애.
 -
민경아...
 -


얘기를 하자. 이젠 더이상 피할 수가 없다.

 -
,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
뭔데? 또 엉뚱한 소리 하려는 건 아니지?
 -
...모레 군대 가...

그 녀의 눈이 커졌다. 탁자에 올려진 손이 파르르 떨리면서 쥐고 있던 냅킨을 떨어뜨렸다.

 -
민경아...
 -
, 지금 그, 그말 농담이지? 그렇지?

예상했던대로였다. 그 녀는 몹시 충격을 받은듯 했다.

 -
그렇지? 지금 나 놀리려고 장난하는 거지? 그런 거지?
 -
민경아...

나는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겪어야만 할 이별이라곤 하지만 막상 닥쳐진 이 현실이 내겐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느껴졌다.

 -
, 어떻게...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12월은 되어야 갈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쟎아. 분명히 그렇게 말했쟎아. 그런데 어떻게...
 - ...
그렇게 되어 버렸어. 이젠 어쩔 수가 없어...
 -
, 안돼. 그럴 순 없어. , 난 아직 준비도 안됐는데..., ...

마침내 그 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고 있었다.

 -
민경아. 내가 죽으로 가니? 오래 걸리지 않아. 금방이야. 어차피 다녀와야할 일인데 조금이라도 일찍 다녀오는 게 좋쟎아...
 -
흐흑...안돼. 보낼 수 없어...어떡해. 난 어떻게 해...
 -
민경아, 이러지마. 내가 이러면 정말 내가 떠나기가 힘들어져.
 -
!

그 녀가 얼굴을 들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왜 빨리 얘기하지 않았어? 모레라니...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답답했다. 어떻게 그 녀에게 자초지종을 다 설명할까그 녀는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나는 그 녀가 진정이 될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정도 진정이 된듯 그 녀가 울음을 훌쩍이며 자리를 일어섰다.

 -
어디 가니?
 - ...
화장실.

10
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녀가 돌아왔다. 눈이 많이 부어 있었다.자리에 앉아 숨을 크게 내쉬며 안정을 찾고 있었다.

 -
그런 거였어. 그 얘길 하려고 서울까지...
 - ......

그 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속엔 아직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깨물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왔다.

 -
...이제 어떻게 해야 돼?
 -
기다려...줄 수 있겠니?

그 녀는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녀의 손을 잡았다.

 -
그러면 됐어. 나 후딱 다녀 올께. 자신 있어.
 -
하지만...
 -
됐어, 민경아. 더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마, 지금은...

그 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우리는 아무런 얘기도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식당을 나왔다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그 녀가 저지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공중 전화 부츠로 들어가 어디로 전화를 했다. 잠시후 전화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그 녀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오늘, 내려갈 거지?
 -
그래,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집을 나서야 훈련소 입소시간에 맞출 수 있을테니까...
 -
그럼, 됐어. 나랑 같이 내려가, 오늘.
 -
? 안돼...넌 언니 시중도 들어야되고, 집에서도...
 -
괜찮아. 전화했어, 언니한테. 사정이 생겨서 오늘 내려간다고...집걱정은 안해도 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 가자. 빨리이-. 시간이 별루 없어.

그 녀는 막무가내로 내 팔을 끌었다.

버스는 어둠을 뚫으며 빠르게 달렸다. 마치 우리의 이별을 제촉이라도하듯이... 찻간에서 그 녀는 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 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는 팔을 풀어 그 녀를 감싸 안았다. 그 녀의 어깨가 무척이나 가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우리는 이별을 앞둔 슬픈 연인이었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그 이별을 향해 매정하게 달려만 가고 있었다터미널에 내리자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녀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그 녀를 보내기 싫었다. 최대한 담담하고 의연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이제 정말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밀려드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길 것만 같았다. 보내기 싫었다.

 -
민경아...오늘, 나랑 있어 주겠니...?

그 녀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며 더욱더 가까이 몸을 기대어 왔다방은 비교적 깨끗했다예전에 친구녀석들이랑 늦게까지 술 마시다가 몇번 신세를 진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여자랑 단 둘이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녀도 무척이나 어색해했지만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따랐다내가 먼저 씻고 나오자 그 녀가 욕실로 들어갔다나는 벽에다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피곤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이리라.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물소리가 그치고 욕실문이 열리더니 그 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수연아, 불 좀...꺼줄래?

나는 일어서서 스위치를 내렸다. 잠시 시야가 깜깜했지만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욕실문이 닫히고 그 녀는 자리에 살며시 앉으며 이불을 몸에 둘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그 녀의 윤곽을 찾을 수 있었다.

 -
이제...불 켜두 돼.
 -
그냥, 이대로 있자.

나는 그 녀 곁에 조금 떨어져서 자리에 앉았다. 그 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어색했다. 담배를 피웠다.

 -
피곤하지 않니? 그만 자라...
 - ......

그 녀가 몸을 약간 비틀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
이리루 와...

그 녀는 자리에 누웠다. 그 바람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녀의 곁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그 녀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 갔다. 놀랍게도 그 녀는 맨몸이었다. 그 녀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민경아...!
 -
...가져. 네게 주고 싶어...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 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입술을 더듬었다. 그 녀는 기다렸다는듯 두 팔로 내 목을 휘어감았다. 그 녀는 이미 열려 있었다. 나는 온 몸 구석구석을 휘몰아치고 있는 격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빰에 묻어오는 서늘한 액체. 나는 흠칫했다. 그것은 그 녀의 눈물이었다. 그 녀는 나를 껴안은채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은 순전히 내 욕심일 뿐이다. 내 욕심때문에 유리잔 보다도 깨어지기 쉬운 그 녀를 다치게 할 순 없다자리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녀는 고개를 돌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 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민경아...미안해. ...다치게 하고싶진 않아...

그 녀는 내 손을 자신의 뺨에 부비며 말했다.

 -
...두려워. 모든 게...

나는 다시 그 녀의 옆에 누웠다.

 -
그만 자. 아무 생각도 하지말고 그냥 이대로 잠드는 거야. 한 잠 푹 자고 나면 훨씬 좋아질 거야.

나는 그 녀의 손을 꼭 쥔채 가뭇가뭇 잠이 들었다무엇에 놀란듯, 언뜻 정신이 들었다. 곁에 그 녀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녀가 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
민경아...
 -
좀 더 자. 이제 겨우 다섯 시야.
 -
자지 않았었니?
 -
좀 전에 깼어. 일어나서 수연이 자는 모습을 바라봤어. 잊어버리지 않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좀 더 자...
 -
괜찮아. 그만 일어나자. 집에서 많이 걱정하시겠다.

여관을 나왔다새벽의 거리는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내 마음 탓이었을까... 택시를 잡아타고 그 녀의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가는 내내 그 녀는 아무 말도 않고 내 손만 잡고 있었다그 녀의 집앞 골목에서 차가 섰다. 그 녀가 내렸다.

 - 민경아, 나 이제 간다. 들어가기 전에 전화할께.
 -
...

그 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
울지마. 그럼, 나 마음 편히 가질 못해. 나 없는동안에도 절대 울거나 약하게 굴면 안돼. 알겠지?
 -
..., 알았어. 안 울께...울지 않아...
 -
그래...갈께...아저씨 출발하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녀가 달려왔다.

 -
건강해야 돼! 밥 굶지 말구...아프면 안돼! 편지 자주 쓰고... 그 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매달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았다간 그대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차 시트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뜨뜻해오고 있었다.

                               
    ---
어쩌면...여기서 이 이야기는 끝을 내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 녀에 대한 애틋하고 사랑스런 감정만을 간직한 채 말이다. 이 이상 그 녀에 대해서 추억한다는 것은 내겐 너무 힘겨운 고통이다. 묵은 상채기를 헤집고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것 처럼... 나는 그 녀에 대한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작업을 시작했고, 이제 그것은 감정의 정점에 도달해 있다. 더이상 얼마나 내 감정의 굴곡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부려낼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벌써부터 내 이성적인 사고는   흐려지기 시작했으므로......



나는...군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객관적인 상황이든, 아니면 내 주관적인 논리이든간에 될 수 있으면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내게 절망과 또 절망의 세월이었으므로. 어느 한 작가의 얘기로 짧게 대신했으면 한다.

 - ...
군인은 군번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그의 정신속에 죽음의 의식도 함께 이식받는 것이다......

혹독하리만치 매섭던 그해의 첫겨울 어느 날, 그 녀가 면회를 왔다. 부대 전체를 통털어 내 밑의 쫄병이라곤, 채 열명이 넘지 못하던 시절, 그 녀와 헤어진지 만 오개월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아침부터 심상치않던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 결국, 눈도 비도 아닌 반쯤 젖은 얼음덩어리를 토해내고 있었다상상이 가는가. 자대로 배치받은지 채 두달도 못되는 쫄병의 몰골이 어떠하리라는 것이...그것은 아이러니한 블랙코미디의 주인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나는 그 녀를 맞으러 면회실로 향했다.

 ...힘들지...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애...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거야...왜 편지 자주 안해...많이 보고 싶었어... 내 사랑을...어떻게 그 녀에게 말로 다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 그 무덥고 지루했던 신병 교육대 시절, 그 신교대는 천국이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는, 지독했던 2차 교육훈련, 말로 다 할 수도 없을 자대에서의 첫 신고식, 그리고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되었던 훈련과 구타... 그 악몽과 같은 고통속에서도 오로지 너 하나때문에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었다고...차마 그렇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말은 하고 있었지만 말을 하는 게 아니었고, 웃고는 있었지만 웃고 있는게 아니었다.

 -
수연아...사랑해...

그랬다! 나는 그 한마디를 듣기위해 그렇게 살아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죽어도 잊을 수 없을 내 그 사랑을 위해서 말이다... 짧은 면회를 끝내고 나는 위병소까지 그 녀를 마중했다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그 녀는 비처럼 축축해진 진눈깨비를 그대로 맞았다.위병소 입구에 다달았을때 이미 그 녀의 눈시울은 눅눅히 젖어 있었다.

 -
수연아, 나랑 그냥 이대로 가면 안되는 거니? 이대로 같이 가버리면 안되는 거야? ? ...

하지만 자대로 배치받은지 두달이 안되는 병사는 어떠한 형태의 외출, 외박도 허가가 되지않는 부대의 방침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 녀가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이를 깨물었다. 그 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추울까...

 -
민경아...그만 가. 곧 날이 어두워져. 감기 들겠다...
 -
널 두고 어떻게...어떻게...
 -
나랑 약속했지? 절대 약한 모습 안 보이기로. 이대로 씩씩하게  잘 돌아가는 게 날 위하는 거야. 행여라도 울면 안돼. 알았니?

그 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대신...나한테도 한가지 약속해 줘. 건강해야 돼절대로 어디 아프거나 하면 안돼. 알았지, ?
 -
그래, 약속할께...그만 가...

그 녀가 돌아섰다. 천천히 위병소를 빠져나가는 그 녀의 뒷모습이 너무도 측은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저 문을 넘어 그 녀와 함께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산도 하나 없이...불쌍한 아이... 그 녀는 가다가 몇번이나 손을 흔들고 또 가다가 다시 돌아서곤 했다. 나는 시야에서 그 녀의 모습이 흐릿해질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렇게, 서글픈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 구루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13편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편에서 말씀드렸듯이... 하지만 제 글을 아껴주시고 또 같이 아파하고 공감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사랑을 그냥 외면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제 하나의 아픈 추억이 어떤 참고적으로나마 다른 많은 분들께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저의 도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대해 달라는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군요. 애초의 어떤 흥미를 끌기위해 시작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읽어주시는 단 한분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마무리 지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guru



휴가는 꿈이요, 병장은 전설이고, 제대는 신화라는 말이 있다. 군생활의 고단함을 단적으로 지적한 말이겠지만...내게도 그 꿈은 이루어졌다. 첫 휴가를 나가게 된 것이다정지된 것으로만 여겨지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녀가 보고 싶었다. 동기녀석들이 술이나 한잔 하고 헤어지자는 것도 마다하고 바쁘게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내내 나는 벅차오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 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내 그리운 그 녀를... 버스의 속도가 느리게만 느껴졌다그 녀의 학교로 내달았다. 입대전에, 교내에서 눈에 띄는 군복의 모습을 그리 곱지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나였지만 지금 내 입장이 이렇게 뒤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과사무실에 들러가까스로 그 녀의 강의 시간표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간표상으론 그 녀는 아직 수업중이었다. 강의실앞 계단에서 수업이 마치길 기다렸다. 이윽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면 강의실 문이 열렸다. 나는 비스듬히 비켜서서 그 녀를 찾았다. 그 녀가 보였다. 그 녀의 뒤를 좇았다. 뒤에서 그 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 녀가 돌아보았다. 그 녀의 눈이 커졌다.

 -
, 수연아!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빙긋이 웃었다.

 -
언제 나온 거야? 지금 나온 거야, ? 휴가 나온 거지? 그치?
 -
그래...지금 막.

그 녀는 너무너무 기뻐했다. 나도 기뻤다

 -
잠깐만 기다려. 나 도서관에 가서 가방 가지고 나올께.
 -
수업...남은 거 아니니?
 -
얘는, 지금 수업이 문제니?

그 녀는 들떠 있었다. 줄달음에 도서관으로 뛰어올라가 가방을 가져 내려왔다. 내 팔짱을 꼭 끼고 행복해하는 그 녀의 모습에서 나는 여지껏 나를 지탱해준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그날밤, 우리는 우리 둘만의 오붓한 자리를 가졌다. 실로 얼마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이었던가... 그 녀가 가방에서 조그만 케이스같은 것을 꺼내며 말했다.

 -
이거...수연이가 휴가 나오면 주려고 늘 가지고 다니던 거야...
 -
이게 뭐니?
 -
열어 봐.

그것은 금도금이 된 하트모양의 사진틀이었다. 체인이 연결되어 있어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두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 그 녀가 환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민경아...
 -
그거...잘 간직해야 돼? 항상 나 생각하라고 주는 거야.
 -
난 아무 것도 준비 못했는데...
 -
, 괜찮아. 그냥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난 기뻐. 정말이야.
 - ......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상의 모든 연인들에겐 신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내뿜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훈훈해질 수 있으므로...

 -
근데, 민경아. 너 얼굴이 좀 상한 것 같다. 공부가 아직도 많이 힘드니?
 -
...아냐. 그냥 요즘 머리가 좀 아파. 두통약을 먹긴하는데...별루 효과도 없는 것 같고. 빈혈기가 있는지 가끔 머리가 핑 돌기도 하고하지만 괜찮아. 늘 그래오던 건데, .
 -
그래...좀 쉬어가면서 공부해라. 많이 피곤해 보인다.
 -
알았네요. 내 걱정은 마시고 그 쪽이나 아무 탈없이 빨리 제대하기나 하시죠. 이제 겨우 작대기 두개 달아서 어느 세월에 제대하누? 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데 나 어떡할 꺼니?
 -
, ? 이 자식이...하하하...
 -
호호호...
 
보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보름동안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 녀를 만났지만 언제나 아쉬움, 아쉬움 뿐이었다. 주렸던 우리의 사랑을 보상해 주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복귀를 해야 했다. 아직 우리 앞에 놓인 세월의 벽은 너무도 높기만 한데...

 -
걱정마. 시간 금방 갈꺼야. 또 휴가 나올 텐데, .

그 녀를 위로하기 위해 내가 말했다.

 -
...어쩐지 이렇게 수연일 보내고 나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자꾸 들어...불안해...
 -
짜식이...장도를 눈앞에 둔 서방님한테 그런 얘기하는 게 아냐. 잘 지내야 돼. 알았니?
 -
...

대답하고 있는 그 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둡게 느껴졌다...

사랑에 있어 신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모른척 방관하는 일밖엔 없다고 했다. 최소한 그렇게만이라도 해주었어도 좋았으련만, 신은 우리의 사랑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순 없었던 모양이다이별은 어이없게도 너무나 쉽게 오고야 말았다...



그 녀의 편지에서 기다림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야기가 눈에 뜨게 늘어난 것은 부대 복귀 후 채 두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휴가는 또 언제 나오느냐, 보고 싶다, 빨리 나와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자신을 좀 붙잡아 달라, 너무 힘들다...그런 식으로 그 녀의 편지는 두서가 없었고 하루에 몇통씩 달아서 편지가 오는가 하면 어떤 땐 일주일내내 편지 한 통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무엇이 그 녀를 그토록 힘들게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부대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잇달은 총기 사고와 탈영, 그리고 구타사건으로 이어지는 여러 문제들로 딴 곳에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오래도록 그 녀에게 답장을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강확립 차원에서 정기휴가를 제외한 일체의 휴가나 외출, 외박을 금지시키는 통에 상황은 점점 어렵게만 변해갔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 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연락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유는 묻지 말아달라는 지극히 짧은 내용의 편지였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슴이 초조해왔다. 그 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그 녀로부터 이미 무슨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별다른 얘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녀가 지금 몸이 좀 좋지못한 상태이니까 심리적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앞으로 전화도 자제해 달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더욱 갑갑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어떤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 한마디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 그 녀, 차분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히 무슨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녀 어머니의 초조한 목소리...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녀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그 녀의 집에 대신 전화를 걸어 그 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며칠 후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지난번 내가 전화를 했을때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답답하고 또 답답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채 가을을 느낄 틈도 없이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 무렵, 나는 두번 째 휴가를 나갔다바로 그 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걸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걸고, 또 걸고... 10분 간격으로 하루종일 전화를 했다. 그래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 녀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새벽이 깊어질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갈뿐 역시 아무도 없었다. 또 그 녀의 집으로 갔다. 기다렸다.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 녀를 만나야 겠다는 한가지 생각밖엔 없었다점심도 걸르고 또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
누구...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 고개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 녀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
민경이 어머님이시죠?
 -
혹시...
 -
, 한수연이라고 합니다.
 -
...

그 녀의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탄식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
젊은이, 내가 분명히 이러지 말라고 얘기했을텐데?
 -
어머님, 제발 무슨 일인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저 여기서 이틀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말이든 듣지않고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도대체 민경이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민경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제발...

나는 흥분을 하고 있었다.

 -
그냥 돌아가요. 그게 민경이나 젊은이를 위해 피차간에 좋을듯하니...
 -
안됩니다. 전 돌아갈 수 없습니다.
 -
젊은이!
 -
제발...부탁입니다. 민경이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 녀의 어머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격앙되어있는 내 모습에 마침내 체념을 한 듯,

 -
...할 수 없군...들어와요.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이상하리만치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그 녀의 어머니는 거실로 나를 안내하고 차를 가져왔다. 마주 앉았다. 한동안 묵묵히 차만 마시던 그 녀의 어머니는 드디어 결심이 선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수연이라고 했던가...민경이한테서 얘기 자주 들었어요. 잘 대해 주었다고...우리 민경인...지금 집에 없어요. 몸이 많이 안좋아서...
 -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죠?

그 녀의 어머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 찻잔을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어머님...
 -
사실은...

하지만 그 녀의 어머니는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으로 손을 막으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
그애가...그애가...흐흑,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흐흑!

결국 그 녀의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맺히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
, 어머님 진정하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민경이에게 무슨...사고 라도...?

하지만 그 녀의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난 후 어느 정도 진정이 된듯 크게 숨을 들이키며 가슴을 쓸었다.

 - ...
미안해요, 젊은이.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 ......
 -
민경인...이제...얼마 살지를...못할 것...같아요...
 -
?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
,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민경이가......종양에...이미 두 차례 수술을 했지만...

, 하느님. 하느님어떻게, 어떻게 민경이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어떻게!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속으로 추락했다그랬다. 그랬던 것이다그 녀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한 것도, 갑자기 나를 멀리하게 된 것도, 그리고 잊으라고 한 것도 모든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와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그 녀가 세상을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딱 한번 재회할 수 있었던 때의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그 순간을 회상한다는 건...내겐 너무 잔인한 고통이다. 이미 내 손은 떨리고 눈앞이 흐려오고 있다이제...마무리를 지어야할 때가 왔다그 녀는 내가 부대로 복귀 후 채 석달도 지나지 않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스물 세 해의 생을 마감했다그 녀는...죽기전에 내게 한가지 유품을 남겼다. 그것은 나를 다시 만난 그 해 봄부터 기록이 시작된 그 녀의 일기장이었다. 그 일기장은 소포로 나에게 전해져 왔다. 지금 그 일기장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나는 그 녀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죽음이 임박해올 무렵까지의 그 두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기록된 몇 날의 일기를 발췌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마 치고자 한다한때, 내 젊은 날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기를 이끌어 주었던 그 녀, 그리고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거대한 상처를 안기고 가버린 그 녀...이제는 망각해야하리라. 정말...잊어야만 할 것이다...-, 내 사랑...

그 녀의 일기다...



6
xx일 화요일
수술 날짜가 모레로 잡혔다. 하지만 별로 기대는 없다...이미 암세포는 내 온몸을 덮어 누르고 있는데...머리가 또 한움쿰 빠졌다. 이젠 항생 주사 맞는 일도 진력이 났다. 그에게 연락을 끊은지 벌써 두달이 넘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지금은 당황하고 혼란스럽겠지만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싶다. 그에게까지 고통을 주긴 싫다. 이 고통은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다. 하지만...그가 너무나 그립다. 또 눈물이 난다아직까지고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7 xx일 목요일
수술후 처음 잡는 펜. 기운이 없다. 재수술을 해야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 땜에 고통받고 계신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다. 어차피 난 죽어야할 몸인데... 

7
xx일 수요일
엄마가 그에게서 온 편지를 또 가져왔다. 읽지 않았다. 읽으면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요즘도 계속 집으로 전화가 온단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하지만 당신은 날 잊어야해요. 난 당신에게 짐밖에 되지않는 걸...

8
xx일 화요일
갈수록 점점 기운이 없어지고 있다. 이제 이렇게 펜을 잡고 있는 것도 힘이 든다. 그가 보고싶다.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하지만, 그는 너무 먼 곳에 있다...부질없는 욕심인줄 안다. 그는 행복해져야 한다. 나로인해 불행해져선 안된다. 하나님, 그에게 힘을 주소서...후에 이 사실을 알고난 후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바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9
xx일 금요일
하루종일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허연 물만 올라왔다주사약의 양은 눈에 뜨게 늘어가고...이제 죽음이 임박했다. 더 이상  이렇게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가는 게 지겹다. 이젠 죽음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겐 스스로 죽음을 불러올 용기도 힘도 남아있지 안다...

9
xx일 토요일
예전에 썼던 일기를 읽고 잠시 그와의 추억에 잠겼었다. 언제나 자상하고 넓은 가슴을 지녔던 그.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이었고 마지막 아픔이 되어버린 사람...또 눈물이 난다. 예전엔 행복이었던 그와의 추억이 이젠 가눌수 없는 슬픔으로만 다가선다...그가 그립다. 미치도록...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 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 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그가 즐겨 읊어주던 정호승님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낭랑하던 그 목소릴 이젠 다시는 들을 수가 없겠지......

10
xx일 월요일
너무 아프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엄마를 붙잡고 소리를 쳤다차라리 그냥 죽게해 달라고. 엄마는 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도 울고...병실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나 때문에 한층 늙어버린 것 같은 엄마. 난 왜 이렇게 못된 딸일까......

11
x일 수요일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펜이 자꾸 손에서 미끌어진다...생각도 할 수가 없다...통증...통증 뿐이다... 그는 알까...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사랑을 느낀 후 단 한순간도 그의 생각을 하지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에 대한 그리움에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사무쳐한 날이 얼마나 많았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 그의 눈빛,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내겐 행복이었고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그리운 내 사랑... 죽기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그를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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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입니다...이제 이 고통스러웠던 작업에서 드디어 해방입니다... 오늘...수업을 마치고 술을 한잔하고 왔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 지을 작정으로 말입니다. 청승맞게 혼자 술집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 두병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보같게도 지금, 제 앞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소주 한병이 또 있습니다. 잠시라도 빨리 이 글을 끝내고 싶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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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가...지금 제 감정에 휩쓸린 채...키보드 자판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 군요. 눈 앞이 흐려서...타이핑이 무척 느립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잊어버리고 싶어 시작했던 글이...도리어 이렇게 무거운 짐이 되어 저를 억누를 줄은...  이제...그 녀에 관한 글은 다시는 쓰지않을 작정입니다...그 녀는 이미 제 마음속에서도 죽었으니까요... 재미도 없는 글, 읽으시느라고 애들 쓰셨습니다. 여러분 안녕히...건강하시길...그리고 아픈 사랑은 절대 하지 마시길...


[
후기]
...
소설을 시작한 이래, 저는 내내 어떤 열병같은 것에 시달렸습니다단 한차례도 맨정신으로는 글을 쓸 수 없을만큼 제겐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여러분들의 꾸준한 관심과 격려가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글을 끝낼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매일 술을 먹고 주정부리 비슷하게 글을 올린 것 사과 드립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언가 내가 해야만 했을 한가지 일을 완전히 끝낸 느낌입니다. 정말, 이젠 잊어야겠지요. 사람이 변해간다는 것, 왠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모양입니다. 그럼으로인해 점점 앞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는 것이겠지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말만이 변하지않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서서히 몸으로 느껴가며...이제 한참동안 저를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환희와 절망을 느끼게 했던 이이야기와 저의 그 녀도 함께...잊어야겠습니다. 아니, 잊어야겠지요.

건강하십시오, 여러분...

언젠가 다시 뵙게 될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성숙되고 진솔한 이야기들로 말입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gu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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