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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브루스 윌리스란? 본문

Movies/2000~2007

한국에서 브루스 윌리스란?

snowfrolic 2005. 3. 9. 08:17

개인적으로 브루스 윌리스를 좋아하는데 "필름2.0"에서 재밌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할리우드산 국민 배우 브루스 윌리스. 한국에서 브루스 윌리스란 무엇인가?

[필름 2.0 한승희 기자  2005-03-08 11:50]



<다이 하드> 이후 17년이 흘렀다. 51세가 되도록 끊임없이 찾아온 브루스 윌리스는 올해도 어김없이 신작을 들고 온다. 그런데 이 배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한국에서 '브루스 윌리스'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돌출 종자라 이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사람은? 비사이로 막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하드는? 다이 하드. 초등학교 교실부터 TV 오락 프로그램까지 그런 개그가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 말 그대로 ‘쌍팔년도’ 일이었다. 1988년 개봉한 <다이 하드>는 영화를 보기 전까진 도통 이해하기 힘든 ‘Die Hard’라는 제목과,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생판 몰랐던 ‘브루스 윌리스’(당시 공식적인 표기는 ‘부르스 윌리스’)라는 배우를 한 시대를 풍미하는 키워드로 등극시켰다. 전 국민이 ‘반(半) 스포츠 마니아’로 살았던 88서울올림픽 기간 중인 9월 24일,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개봉한 <다이 하드>는 이듬해 3월 2일까지 무려 161일 동안 장기 상영했다. 대형 간판 속의 브루스 윌리스는 피범벅 투성이의 몰골로 가을, 겨울을 나고 봄을 맞았다. 그 간판 아래로 암표를 거부한 양심적인 관객들의 행렬이 종묘까지 이어졌고, ‘노태우 타도’와 ‘양키 고 홈’을 외치며 광화문에서부터 행진하던 시위대가 지나갔다. 그리고 엄연한 생업을 위해 종로통을 들락거려야 했던 보통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정부 원년에 도착한 할리우드 스타 브루스 윌리스에게도 보통 사람의 이미지가 있었다. 테러리스트 12명과 혼자 맞장을 뜨면서 겁내고, 화내고, 다치고, 징징대던 그는 냉동 심장을 가진 다른 근육질 영웅들과는 달랐다.


단일관 개봉 시대의 마지막 보이스카웃

브루스 윌리스는 단일관 개봉 시대의 마지막 스타이자 홈비디오 시대를 연 최초의 스타였다. 멀티플렉스가 보편화된 요즘이야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를 어느 극장에서건 볼 수 있지만, 당시 관객들은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다이 하드>를 보려면 특정 극장을 찾아야 했다. 프린트 벌수가 제한돼 있었고 지역별로 배급권을 독점하던 시기였다. 서울에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1988년은 직배 영화 시대가 열린 역사적인 해였다. <다이 하드>와 같은 날 UIP의 <위험한 정사>가 개봉했다. 태흥영화가 수입, 배급한 <다이 하드>는 당시 팽배했던 반직배 감정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관객 몰이를 할 수 있었다. 오락성이 강한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단성사에서 개봉하면 웬만한 흥행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으나 브루스 윌리스라는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죽도록 고생하는 <다이 하드>는 순전히 입 소문으로 그 해 1등(서울 관객 781,893명)을 먹었다. 1989년 3개관으로 개관한 씨네하우스를 시작으로 단일관이 점차 줄어들었고, 1994년 14벌로 묶여 있던 프린트 벌수 제한이 폐지되면서 단일관 개봉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렸지만 1990년 <다이 하드 2>도 단성사를 끼고 상영돼 ‘다이 하드-브루스 윌리스-단성사’는 한 묶음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1980년대 단성사는 성룡 영화의 단골 상영관으로 액션영화 팬들에겐 추억이 있는 극장이었다. ‘영화 1번지’ 종로의 가장 ‘끗발’ 있는 극장에 161일이나 얼굴을 걸어놓은 브루스 윌리스는 한국 데뷔전을 아주 중요한 시기에 아주 중요한 장소에서 치른 셈이었다.


폭발하는 비디오 시장 또한 ‘부르스’의 무대였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3백만 대 이상이 보급된 VCR은 1990년대 초반 영화 시장의 네 배가 넘는 1조 원 규모를 단숨에 형성했다. 한 동네에 비디오 가게가 슈퍼만큼이나 많았다는 시절이었다. <다이 하드>의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아줌마, 아저씨가 점주인 대여점과 남녀노소가 고객인 소비자 모두에게 막강한 스타 파워를 행사했다. 1990년 10월 출시된 <다이 하드 2>(8만 장)는 1993년 10월 출시된 <클리프 행어>(8만5천 장)가 기록을 깨기까지 만 3년 동안 대여용 비디오 시장에서 최고 판매 기록을 보유했다. 그 사이 <허영의 불꽃> <빌리 배스게이트> <마지막 보이스카웃> <허드슨 호크>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등 그저 그런 영화들이 적어도 비디오 대여점에선 브루스 윌리스 영화라는 이유만으로도 대접을 받았다. 안방극장이야말로 브루스 윌리스의 고향이었다. 1989년부터 KBS-2TV에서 방영된 <블루문 특급>은 외화 시리즈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1990년대 후반까지 명절과 연휴마다 방영되는 <다이 하드> 시리즈로 시청자들에게 ‘할리우드의 성룡’ 같은 친근함을 주었다.


스토리 오브 브루스 윌리스

세상에는 별 이유 없이 미움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운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막연한 동경심과 함께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할리우드 스타 중에는 잘나서 얄미운 스타들이 꽤 있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완벽한 미소로 좌중을 휘어잡는 톰 크루즈나 금발의 팔등신 미녀 니콜 키드먼 같은 배우가 전자에 속한다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들면 실실 ‘쪼개는’ 눈빛으로 입 꼬리를 ‘씨익’ 올리는 브루스 윌리스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깐죽거리고 싶을 때 깐죽거린다. 특히 잘난 체하는 사람,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너무 진지한 사람 앞에선 특유의 눙치는 태도로 김을 팍 빼버리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 그런 표정과 말투는 건방진 인상을 주기 마련이지만 브루스 윌리스가 그러면 되려 친근한 마음이 든다. 그의 ‘시니컬’에는 누군가를 한번쯤 비웃어 주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판타지가 투영돼 있다.


<다이 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존 매클레인 형사는 한마디로 말해 대책 없는 인간이다. 의협심이 많아 수훈도 많이 세우지만 급한 성격과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정직 처분도 자주 받는다. 존은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면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산다. 사위가 치과 의사가 아닌 게 못 마땅한 장모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의 속 보이는 ‘뻐꾸기’에 안 웃고는 못 배긴다. <블루문 특급>의 데이비드 에디슨 주니어는 전직 모델 매디 헤이스와 함께 탐정 사무실은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 데이비드가 한 마디 하면 매디가 한 마디 하고, 매디가 한 마디 하면 데이비드가 한 마디 한다. 상대에게 한 마디도 안 지려는 이 아옹다옹 줄다리기에서 데이비드는 천연덕스러운 유머와 능구렁이 같은 잔머리로 쉽게 상황을 역전시켜 버린다.


브루스 윌리스의 초기 스타 이미지를 규정한 <다이 하드>와 <블루문 특급>은 정의롭고 신사적인 백인 남성이라는 남자 스타의 주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1990년대 한국에서 브루스 윌리스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케빈 코스트너나 멜 깁슨 등은 풍성한 머리카락 말고도 가진 게 많았다. 각각 <늑대와 춤을>(1990)과 <브레이브 하트>(1995)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그들은 연기는 물론이고 연출과 제작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할리우드 파워 엘리트였으나 브루스 윌리스는 이상한 영화에나 나오지 않으면 다행인 액션 스타였다. 케빈 코스트너나 멜 깁슨은 종종 로맨스영화로 재미를 보았으나 브루스 윌리스는 운동화만 신고 섹스 신을 찍은 <칼라 오브 나이트>(1994)로 ‘주책바가지’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배우로서 준수했던 청년의 시기가 없었던 브루스 윌리스는 처음부터 반죽이 좋은 아저씨였다. 다른 배우들이 폼생폼사가 모토였다면 브루스 윌리스의 생존 전략은 한마디로 넉살이었다. 죽도록 고생을 하면서도, 피곤하게 꼬이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낙관적으로 이겨내는 여유를 보였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 남자는 최고는 아니지만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브루스 윌리스는 문화권의 차이로 한국 관객에게 많은 단점을 노출하지 않았다. 샌들 안에 양말을 신거나 이상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엽기 패션으로 자주 워스트 드레서에 지명된 그였지만 파파라치들이 찍어내는 황당한 패션 감각을 볼 기회가 적은 한국 관객들에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두루 번잡한 사생활도 태평양을 건너면 걸러지기 마련이었다. 결정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브루스 윌리스의 치명적인 약점은 비영어권 관객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에선 다분히 멍청한 졸부 스타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그건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90년대 영화 문화의 식스 센스

형사 아니면 킬러. 주로 그런 역을 전전하던 브루스 윌리스가 아동심리학 ‘박사’로 출연한 건 정말 의외였다. 영화 한 편에 사람 여럿을 죽이던 브루스 윌리스가 죽은 사람을 연기했다는 것도 뜻밖이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1999)는 <다이 하드>로 10년을 버틴 브루스 윌리스의 다음 10년을 기대하게 만든 영화다. 외화 번역가 이미도 씨는 한국에서 <식스 센스>를 처음 본 관객이다. 배급사인 브에나비스타코리아의 관계자들은 번역을 맡은 이미도 씨를 초대해 내부자 시사를 마련했으나 공교롭게도 중요한 회의가 생겨 이미도 씨 혼자 영화를 보도록 했다.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던 이미도 씨는 문제의 그 반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감동이었다. 이런 영화를 덩그라니 혼자 본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시사가 끝나자 관계자들이 영화를 어떻게 봤냐고 물었다. 이미도 씨는 입을 뗄 수 없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계속 물었다. 이미도 씨가 결국 실토했다.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야.” 그들은 믿지 않았다. “거짓말 마. 어떻게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야? 빨리 말해봐.”


<다이 하드 2>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네는 엉뚱한 때에, 엉뚱한 곳에 있는, 엉뚱한 놈이야.” 한국 관객들에게 브루스 윌리스는 정말로 그런 존재였다. 1994년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추석 시즌을 맞아 전세계 최초로 개봉한 <펄프 픽션>은 그냥 ‘브루스 윌리스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평범한 관객들에게 기가 막히게 엉뚱한 충격을 줬다. 47회 칸영화제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펄프 픽션>은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맞물리면서 여러 장의 챕터로 구성된 복잡한 영화다. 사전 정보가 없었던 관객들은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환불 소동을 비롯 별별 해프닝이 속출했다. 시나리오 작가 심산은 저서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의 ‘얼터너티브, 대안적 시나리오의 한 돌파구’라는 장에서 <펄프 픽션>의 국내 개봉 시 벌어졌던 웃지 못할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방의 한 극장 업자가 <펄프 픽션>의 프린트를 받아들고 자체 시사를 해본 결과 놀라운 결함을 발견했다. 껄렁한 깡패인 빈센트라는 놈이 분명 앞에서 죽었는데 다음 프린트(릴)에서 또다시 등장하는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극장 업자가 내린 결론은 명쾌했다. 이런, 프린트 번호를 잘못 썼네. 무식한 배급 업자들….' 심산은 이어 덧붙였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는 얼터너티브가 얼마나 불편한 스토리텔링인지 보여 주는 예다.'


브루스 윌리스는 한국 관객들에게 엉뚱하고 낯선 영화 체험을 던졌다. <펄프 픽션>이 정점이었지만 실은 <다이 하드>부터 그랬다. 주인공이 꾸질한 ‘난닝구’를 입고 폐쇄된 공간에서 리얼 액션을 펼치는 <다이 하드>는 전세대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텔론의 막무가내 액션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SF 장르 외에는 특수 효과가 낯설던 시대, ‘배우 모가지가 돌아가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코미디 <죽어야 사는 여자>(1992)도 꽤나 황당한 영화였다. 브루스 윌리스 자신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웅으로 출연해 스스로를 비웃었던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플레이어>(1992)나 한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4편의 옴니버스영화 <포 룸>(1995), 천재적인 스타일리스트 테리 길리엄과 뤽 베송의 SF영화 <12 몽키즈>(1995)와 <제5원소>(1997) 등에 얼굴을 내민 브루스 윌리스는 90년대 영화 문화의 울퉁불퉁한 지형도를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듯 드문드문 확인해 주었다. 브루스 윌리스는 극장용이었고, 비디오용이었고, TV용이었고, 건전한 가족용이자 하릴없는 킬링 타임용이었으며, 대부분 블록버스터용이자 가끔은 예술영화용이었으며 그냥 그 자체로 ‘브루스 윌리스 영화용’이었다.


오늘도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

브루스 윌리스의 신작 <나인 야드 2>(2004)와 <호스티지>(2005)가 ‘브루스 윌리스 마케팅’ 중이다. <나인 야드 2>는 브루스 윌리스의 흥행 기록을 모두 더해 ‘박스오피스 19주 동안 1위 점령’이란 카피를 뽑았고, <호스티지>는 ‘<다이 하드>보다 최악의 상황, 브루스 윌리스 그가 왔다!’라는 카피를 준비해 두고 있다. 여름에는 로버트 르드리게즈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공동 연출한 <씬시티>가 개봉하고 가을이면 10년을 기다린 <다이 하드 4 Die Hard 4: Die Hardest>(2006)가 촬영을 시작한다. 감독은 데이비드 핀처, 리들리 스콧, 얀 드 봉, 롭 코헨, 레니 할린, 존 바담, 그리고 진지하게 거론된 성룡을 제치고 ‘구관이 명관’ 존 맥티어난이 낙점됐다.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존 맥티어난과 함께 출세작으로 돌아간다. 최근 7개관으로 재개관한 단성사에도 <다이 하드 4>는 걸리겠지만 161일간 '보통 사람들의' 종로통을 지키던 브루스 윌리스는 오늘도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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