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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일기장 본문

Stories

누나의 일기장

snowfrolic 2010. 6. 3. 01:52


여기저기 보관하고 있던 펌 글들을 한 곳에 정리함. 출처는 알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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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길가를 내다보는 창이 맑게 보이는 누나의 책상은 누나가 떠난 뒤에도 항상 깨끗합니다. 가끔 엄마가 누나 방을 치워 준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외엔 아무도 이 방에 얼씬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냥 싸늘하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누나가 쓰던 휠체어는 방 구석에 놓여있습니다. 달력 옆에는 전에 누나가 사서 걸어 놓은 장미꽃 몇 송이가 마른 꽃잎을 아슬아슬하게 벽에 기대고 있습니다.

별 내용도 없는 누나의 일기장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게다가 허약한 몸 때문에 여러가지 병에 시달렸습니다. 항상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동생인 나에게 미소를 잊지 않았구요.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면 다 마찬가지이지만 누나는 삶을 자각할 때부터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비극이 있었던 것인가 봅니다. 아무튼 난 며칠 전부터 누나의 일기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방에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엄마하고 가끔 공원에 가거나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종일을 집에 있는 누나의 일기장은 내가 생각 했던 것처럼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냥 죽은 누나의 체취가 어려있는 방에 잠깐잠깐 들어와서,침대에 한번 누워보기도 하고,그러다가 잠이 들기도 하고 했습니다. 워낙 누나는 말도 없고 또 집에서 죽은 듯이 살던 사람이어서, 이 세상에서 떠난지 한달이 넘은 지금도 난 누나가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가끔 방을 어정대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우연히 누나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읽게 됐습니다.

다섯권의 일기장을 누나의 책꽂이 한 구석에서 찾아내고,그리고 이제 세권째 읽고 있습니다. 누나는 워낙 일상이 단조로왔나 봅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들,아무렇지도 않게 뜨고 지는 해와 달, 별, 하늘의 구름.. 누나는 가끔씩 하늘의 색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해서 한페이지 이상 쓴 적도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누나같이 지루한 삶은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이 그처럼 많은 색을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구름과, 바람과, 별 그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비록 좁은 남쪽 창을 통해서이지만.

난 세권째 일기장을 읽으면서 우연히 그 다섯권의 일기장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누나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세권째 일기장까지 누나는 그 두꺼운 일기장의 끝까지 쓰지 못했습니다. 삼분지 이 쯤 쓰다가는 그만 모두 허연 백지가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일기장에 새로운 날짜들을 적어가고.. 하는 식입니다.

누나의 삶의 단위는 그렇게 두꺼운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갈 수 있을정도로 풍요롭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남쪽 창을 통해서 시작하고 끝맺는 하루하루를.. 글쎄요.. 그 일기장에 다 채울려면 지겹고.. 어쩌면 누나는 새로운 일기장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날들을 소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누나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인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새로운 날을 소망하지 않으면 아마 누나의 그 좁은 방, 좁은 창으로 보이는 하루하루가 엄청나게 지루했겠지요..

누나는 가끔씩 일기장 구석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참새들, 뜨는 해, 전기줄,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푸념같은.. 걷지 못하는, 남들처럼 건강을 가지지 못한 자의 신음같은 이야기들.. 누나는 생전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누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누나 대신에 엄마가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끔 누나는 엄마가 누나 때문에 울던 날에 자주 쓰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년 ##월 $$일 날씨 ..그래도 하늘은 나에게 밝은 태양을..

고통받은 자들은 고통을 소리 높이 외쳐야 하는건지...  난 오늘도 남쪽 작은 창에서 세상을 소망하며, 상상하며, 참새떼들이 간간히 날아가며 해주는 이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애쓰며 지냈다. 눈물을 흘리는 것, 슬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 뿐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들도 슬프다는 표현을 눈물 아닌 어떤 것으로 할까.. 저 하늘도, 아침과 저녁에 빛이 다르듯이 어쩌면 순간순간 슬픔의 빛으로 나에게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 왜 인간은 슬픔을 슬픔처럼,고통처럼 울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오늘도 날 목욕시켜주고 나서 울었다.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엄마는 울먹이는 소리로 또 같은 말을 했다. 왜 나는 아무런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냐고. 엄마는 나보고 한번쯤은 울어보기라도, 아픈 다리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싸안고 온 세상을 향해 한번 울어보기라도 하라고 한다. 엄마는 내 창백한 웃음이 보기 싫다고 하신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이 보기 흉한 두다리로 울어왔는데..더 이상 울어볼려고 해도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모르는 나를 엄마는 알까.. 오늘도 새벽 해가 뜰 때 쯤이면 괴로운 청소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좀 있으면 신문돌리는 아이와..그리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날 대신해서 울어주고 있는데..이 남쪽 창을 통해서 보는 모든 것들은 세상이 날 위해 대신 울어주는 눈물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아니면..어쩌면..나에게 이 남쪽 창이 없었으면 내 몸에 있는 것들이 다 나의 눈물로 빠져나갔으리라. 몇일 밤을 새워도 다 흘리지 못할 눈물로..인간에게 이처럼 많은 눈물이 있을까 하고 생각 할 만큼 내 속에 많은 눈물이 있지만 난 남쪽 창에서 보는 모든 것들로 인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다. 엄마는 날 언제나 이해해줄까... 



누나에게 이 남쪽 창은 정말 소중했던 것일까... 그래서 누나는 겨울에도 이 남쪽 창을 비닐로 봉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인가봅니다. 책상에 팔을 괴고 있으면 길건너 아파트가 보이고..그리고 저녁이되면 불들이 하나 둘 켜집니다. 누군가가, 또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세상은, 저 아파트 불빛 처럼 많은 눈물들일까요..? 



****년 &&월 ##일 날씨 --

도시의 오염된 공기가 아무리 탁해도 뜨는 해를 막을 수는 없다.. 나는 이 남쪽 창을 통해 배운다. -- 이 창, 2층 높이니까 바닥까지 한 5미터 정도 되려나.. 일전에 뿌린 채송화씨가 싹이 텄다. 이 높은 곳에서 그냥 무심하게 떨어 뜨렸는데도 채송화씨는 보도블럭 구석 그 조그마한 흙 틈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남쪽 창에 또 한 식구가 느는 샘이다. 채송화를 보며 난 그 채송화가 여기 2층 방 창문까지 자랄 수 도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소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헛된 소망... 소망... 아무도 나의 소망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처럼 수많은 눈물들이 인간에게 허락된 것처럼 그만큼의 소망도 허락되지 않았을까..?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그러나 아주 가까운 곳에 나의 소망이 있더라도 난 이 남쪽 창에 가득한 눈물과 항상 함께 해야하는가보다. 오늘, 그냥 무덤덤한 마음으로 채송화 꽃에게 바라는 것은... 그 많은 씨들, 어쩌면 싹도 피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 많은 씨들에게.. 엄마 채송화는 하나하나 각기 다른 소망들을 품게 해 주었으면.. 보도블럭 구석에 뿌리를 내리는 채송화지만 겨울이 지나면 죽어버린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 많은 씨앗이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새삼 가슴아픈 눈물처럼 다가온다..  내년에도 또 채송화 씨를 뿌려야겠다....



내년 봄에는 이사를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나의 방도 없어진다고 합니다. 엄마도 더 이상 자꾸 죽은 누나를 생각나게 하는 이 방이 견디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때는 누나의 존재 자체는 우리 집의 슬픔 덩어리지만 죽고 나서 엄마는 더 누나를 생각하는게 당연한거지요. 사람이란 그런거지요.. 그렇습니다. 누나는 일기장에 남쪽 창으로 보이는 그 모든 눈물들을 감당하고 살았는데 나는, 엄마는 그 남쪽 창보다 더 넓은 세상을 항상 대하고 있는데.. 슬픔이 그리움으로.. 그리움이 또 새로운 슬픔으로 변하는 것이야.. 하늘 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과 같겠지요. 누나는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참 아쉬움입니다. 아니, 누나가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렸다면 누나는 이 세상에 새로운 눈물을 한방울 더 만든 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누나의 말에 의하면.. 



****년 &&월 ##일 날씨 --

오히려 비는 이 세상의 눈물을 감추어 준다. 흘러 내리는 모든 것들을 체념하게 한다. 하지만 아니야,, 아니다.. 정말 아니다.. 내 남쪽 창에서 그 나름대로의 배역을 항상 맡고 있는 저 태양과 구름과,, 아파트 불빛, 그 안에 사는 외롭고 즐거운 사람들.. 또 아스팔트 길,멀리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그리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사람들..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연극은 모두 비극이다. 비극..지금 비의 커튼이 잠시 막과 막 사이의 휴식을 주고 있지만..또 다시 시작되는 비극은 그 자체가 슬픈 눈물이다. 사람들은 비를 보며 눈물을 생각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이 비극의 뜻을 알게 된다면.. 왜 주인공이 마지막에 슬픈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눈물을 보면서 비를 생각하게 되겠지.. 오늘은 남쪽 창이 비때문에 가렸다... 엄마의 눈물이 생각난다... 채송화는 비를 맞고 있겠지.. 이 비극의 세상에 또 너는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어쩌면 너는 무대 뒤에서 혼자 울어대기만 하는 뜨내기 연극배우가 아닌지.. 해가 가면 또 다시 씨를 뿌리며 언젠가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함께 엉엉 울어보기만을 기대하는.. 그런 삼류 뜨내기 배우.. 꽃술 가득히 이제는 씨를 품어 무거운 허리를 지탱하기에 힘들기만 한 네 모습이 나를 원망하는 것만 같구나..그래 난 너의 눈물을 아니까.. 난 네가 무대 뒤에서 울어도 따라 울수 있으니까.. 너의 씨가 이 땅 어디엔가 가서 퍼져.. 또 그렇게 울어도 그 울음을 다 울어줄 수 있을거야.. 사랑하는 내 채송화.. 



난 가끔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누나의 방에 들어가서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누나는 떠났지만 그 슬픔이 베어있는 누나의 일기장을 볼 때마다,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나도 누나처럼 남쪽 창을 통해 세상이 인간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눈물에 젖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누나의 남쪽 창은, 가끔 초겨울 바람에 너무 차게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 슬픔을 덜어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나의 일기장은 너무 슬프기만 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렇게 세상의 눈물만을 보며 살아가기는 너무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의 일기장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난 그게 참 안타까왔습니다. 그리고 좀 이상했습니다. 난 누나의 그런 슬픔 뒤에는 꼭 그 슬픔 만큼의 소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소망이 없다면..누나는 일기를 쓰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기는 소망을 가진 자만이 쓰는 건데.. 그래서 어쩌면 누나는 인내로,끈기로 일기를 써내려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매번 그 슬픔에 지쳐, 소망 없는 슬픔에 지쳐 일기장을 다 쓰지 못하고 백지를 남길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난 네번째 일기장을 읽었습니다. 또 반쯤 가서 백지가 나왔습니다. 백지들을 몇장 넘겨보다가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다섯번째 일기장을 볼까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은 그정도의 슬픔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사가는 날까지는 충분히 다섯번째 일기장도 다 읽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섯번째는 아마 반도 안썼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일기장이니까요. 누나의 마지막 일기장.. 난 그 누나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이제는 희망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누나의 형상이.. 비록 지금은 죽었지만 슬픔으로만 아로새겨진다는 것은.. 참 가슴아픈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 창백한 미소와 함께.. 슬픔..너무나 슬프게 살아왔던 슬픔.. 하지만 그에 비해서 난 누나의 눈물을 한번도 볼 수 없었고..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더욱 더 마음 속에서 지워질 수가 없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누나의 다섯번째 일기장까지 다 읽고 나면.. 봄이 되고 새 집에 이사가면 보도블럭 틈에라도 싹이 나게 채송화씨를 뿌리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건 감기보다,,이 세상 어느 질병보다 더 지독한..슬픔의 병이니까요.. 그건 누나의 일기장에서 나온 말이였습니다. 슬픔의 병..



****년 &&월 ##일 날씨 -- ...

요즘은 밤새 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고통이 너무 심해졌다. 숨이 가끔 가빠오기는 하지만..그래도 누워있다가 가끔씩 이렇게 남쪽 창을 대하는 것이 고통보다는 만족한 슬픔이다. 의사는 진찰을 하고,, 또 약을 주고..그 하얀 봉지에 든 약을 통해 사람들은 슬픔의 병을 옮기고 다닌다.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그약을 먹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병에 걸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두들 약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남쪽 창은 언제나 슬프다. 오히려 그 하얀 약 때문에..모든 병을 고쳐줄 것 같은 약 때문에 언제나 좌절하고 실망한다. 하지만 난 또 약을 먹었다. 이제는 너무 무미하고 무의미하다. 슬픔을 이길 것은.. 소망.. 희망... 난 언제나 다다를 것 같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또 시작하고..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것은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약을 먹고 치료되지 않은 병,그 슬픔의 병일바 것이..그래..좋겠지.. 



누나의 일기장에서 그나마 희망에 관한 말이 있는 것은 이 일기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누나가 지금까지 적어 온 슬픔의 깊이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하고..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여겨집니다. 난 다섯번째 일기장도 반도 안되서 백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만 책꽂이에 넣어버렸습니다. 며칠 후에는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누나의 책상.. 책꽂이.. 그리고 휠체어도.. 모두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봄에는.. 봄에는 새로운 채송화씨를 뿌려야 하니까요.. 비록 누나는 누나의 삶과 죽음 처럼 일기장도 아무런 희망이 없이 슬픔만 주고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제는 누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까닭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남쪽 창을 보면서 눈물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아파트 불빛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짐을 차에 옮기고.. 워낙 단촐한 식구라.. 누나 때문에 그나마 넓은 2층집에 살았지만 이제는 좀 아늑한 곳으로 옮기고..그리고 누나의 슬픔이 씻겨진 곳으로 간다는게 한편으론 편하기도 했습니다.

누나가 보던 책들은 다 팔아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밖에는 벌써 고물장수가 좋은 벌이가 생겼다고 와 있었습니다. 책들을 노끈으로 묶어 정리했습니다. 시집과.. 그리고 소설책들.. 난 마지막으로.. 누나의 일기장까지 묶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비록 끝까지 쓰지 못한 일기장 이였지만,, 하지만 슬픔만 남을 것이라면 그냥 떠나가게 하는 것이 좋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쌓아놓았던 마지막 책 더미 위에 일기장 다섯권을 올려 놓으니 노끈이 좀 모자랐습니다. 노끈을 가지러 가다가 그만 책 더미를 건드려 책이 쓰러졌습니다. 그통에 맨 위에 있던 누나의 일기장이 방바닥에 떨어지며 다섯번째 일기장의 맨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 졌습니다. 낯익은 누나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 그때까지 누나의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간마다 가서 끝나는 누나의 일기장은 나에게 누나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누나가 무언가를 써 놓았으리라는 생각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난 방 바닥에 앉아 그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일기장에게..

또 다시 남쪽 창을 보며 일기를 쓴다. 사랑하는 내 일기장.. 매번 일기를 쓸 때마다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쓰고 시작하는데.. 일년이 삼백 육십 다섯날이고..이 일기장이 두꺼워야 삼백장도 못되는데.. 내 소망은 그 삼백 날을 가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린다. 또 다시 일기를 쓰면서.. 난 새롭게 소망을 한다. 내 사랑하는 일기장..너만 알고 있으리라 믿어. 넌 나와 함께 이 남쪽 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친구니까.. 지금은 네가 이 습기찬 책꽂이 구석에 있지만.. 내 몸이 건강해 지는 날에는 어디 좋은 곳에 있을거야. 세계일주를 너와 같이 할 수도 있고 저 멀리 보이는... 남쪽 창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너와 함께 갈께.. 너는.. 그냥.. 네 하얀 마음으로 나의 눈물을 받아주기만 하면돼. 그냥.. 이 마지막장에 내가 말하는 소망을.. 내 몸에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내 소망을 못들은 척 간직하고 있다가.. 그냥 내가 세상을 보며 흘리는 눈물을 그냥 받아주기만 하면돼.. 난 지금 이때밖에 눈물을 흘릴 수 없단다.. 내 일기장아.. 난 남쪽 창을 보며 세상이 흘리는 눈물을 생각하지만, 너의 마지막 장을 대하면서 나는 이제 내가 매일 남쪽 창을 통해 보는 세상처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거든.. 세상은 지금 남쪽 창을 통해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있어.

사랑하는 내 일기장.. 내가 너에게만 나의 소망을 말하는 것은,, 나의 소망 때문에 또 다른 더 많은 슬픔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은거.. 너도 알고 있지.. 그렇지? 하지만 그들도.. 그 소망 때문에.. 슬퍼질 수 밖에 없는걸 어떻게.. 매번 나는 일기를 쓰면서 마지막 장에만 곱게 적어둔 내 소망을 다시 볼까 두려워서 끝까지 쓰지 못하고 널 책꽂이게 꽂아두지만.. 또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소망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난 이 조그마한 남쪽 창을 통해 보는 슬픔조차 견딜 수가 없는걸.. 사랑하는 내 일기장.. 이제 또 다시 너와 같이 남쪽 창을 보게 되었어. 미안해..너까지 슬프게 하려는 것은 아닌데.. 너는 꼭 내 소망까지 간직해줘.. 사랑하는 내 일기장..

군데군데 누나의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글자가 있었습니다. 난 떨리는 손으로 다른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도 펼져 보았습니다. 모두, 모든 일기장이 마지막 페이지를 같은 글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누나의 소망은 너무 상처받기 쉬워서 그렇게 마지막에 감추어 두지 않으면 금방 상처받아 사그라들었을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왜 그때까지 누나가 마음의 상처받기 쉬운 소망을 일기장 마지막에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삶의 소망들이 이미 상처받았기 때문에 난 누나의 소망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어쩌면 누나처럼 순결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누나처럼 깊은 슬픔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일까요..

난 누나의 일기장을 가슴에 꼬옥 품었습니다. 누나의 소망까지 품었습니다. 남쪽 창 너머로 세상이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고 있던 그날은 이사가는 날, 늦겨울 오후였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고.. 난 채송화씨를 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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