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gie's Blog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機動戦士ガンダム逆襲のシャア, 1988) 본문

애니 만화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機動戦士ガンダム逆襲のシャア, 1988)

snowfrolic 2025. 5. 7. 23:29


1988년 즈음인가 동네 단골 서점에 들렀더니 못봤던 새로운 건담 대백과 책이 놓여 있었다. "컬러판 뉴건담". 얼른 집어들고 천원짜리 두 장을 내니 서점 아저씨는 "공부나 하지 이런걸 보냐" 하신다. 그런 소리에 굴하기에 그 책에는 너무 멋진 모빌슈트들과 영화의 장면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책을 보고 보고 또 보고한 탓에 모빌슈트들과 등장인물, 이야기들을 전부 알게 되었지만 실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만나지 못했다. 그 이전 작품들인 기동전사 Z건담, 기동전사 ZZ건담도 마찬가지였다. 86년경부터 모은 500원짜리 대백과 책들로 그 영상의 세계를 상상만 할 뿐 실제로 볼 기회는 없었다. 이 전작의 책들을 열심히 본 덕분인지 뉴건담의 이야기가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Z건담과 ZZ건담, 뉴건담의 영화를 본 것은 한참 뒤인 아마도 2012년 경 즈음이었다. 건버스터, 나디아, 에반게리온 등 후배 세대인 가이낙스의 작품들보다도 한참을 늦은 것이다. Z건담은 책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였고, 평이 안좋아 기대가 낮았던 ZZ건담조차도 꽤나 즐기며 만족스럽게 보았다. 조금의 시간 차를 두고 보았던 뉴건담, 공식 명칭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는 의외로 꽤 실망했다. 기동전사 건담이 시작된 1979년 이후로 오랫동안 많은 팬들에게 지지받았던 아무로와 샤아를 그렇게 내버리듯이 마무리 지은 것이 불만이었다.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극장 개봉은 일본 개봉 후 37년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작년 부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2024에서 상영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국내 최초의 상영관 상영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화제가 되었다 (기동전사 F91 포함). 당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기력도 예전같지 않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가지 못했다. 다만 '이거.. 극장 개봉 수순인 것 같은데'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다. 이게 맞을 줄이야 (역시 F91 포함).  

 

아무리 실망했다고는 하지만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기동전사 Z건담 극장판을 보았을 때의 감흥을 여전히 기억하는지라, 게다가 트위터의 수많은 건덕후들이 기대감과 관람 인증을 남기고 있는 이 순간에 그 흐름을 외면할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5월초의 긴 연휴를 마친 첫 근무일이 또 홈런데이라고... 일찍 퇴근하라고 하니, 그래 개봉일인 이날 감행을 결심한다. 롯데시네마 단독 개봉인데다가 당연하게도 상영관이 많지는 않았다. 내 주변에서는 롯데시네마 수원점과 수지점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고 상영관 규모가 조금 더 큰 수지점 6관 저녁 7시 10분편을 선택했다. 

 

건담의 아버지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는 영화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애니메이션 연출자이지 건담 그 자체에 애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Z건담에 연이어 ZZ건담까지 끝내고 다른 작품에 집중하고 싶었으나 스폰서(프라모델 제작사)와 프로덕션 선라이즈로부터 '한편 더'라는 요청을 받는다. 건담은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토미노 감독은 이걸로 건담은 끝이야 더 이상 볼 생각하지마라는 마음으로 캐릭터 디자인을 한다.

 

우주세기 건담의 두 주인공은 1편 당시 어린 십대 소년이었던 아무로 레이와 막 임관한 젊은 장교였던 샤아 아즈나블이다. 샤아는 1편에서 자비가에 대한 복수를 끝마침으로서 동기가 모두 사라진 사실상 역할이 끝난 캐릭터였다. 하지만 인기가 너무 높았던 탓에 그리프스 전쟁(Z건담)에서 어쩌다보니 반지구연방조직 에우고의 리더가 되었고 어쩌다보니 (고아가 된) 까미유의 유사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역할을 부여받았다. 스페이스 노이드의 지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리더로서 행동하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분명한 자각을 했었고,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가족이 찢겨나가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리도 없었다. 더불어 그렇게 아는체 잘하는 뉴타입으로서의 자질도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리프스 전쟁 최후의 전투에서 실종된 후 5년의 공백 끝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이전의 인물과 연결하기에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망토를 휘날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는 네오 지온의 총수라니. 잠옷만 걸친 나나이의 가슴에 안겨서 헛소리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어린 소녀도 가스라이팅하는 변태가 되어 있다니 (Z건담의 시로코의 환생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지경). 지옹도 제대로 조종하지 못했던 그가 사이코뮤로 사자비의 비트 공격을 해내고 있다니. 5년전 티탄즈 격퇴를 위해 손잡은 동료였으나 13년전의 라라아 사태를 다시 떠올리며 죽이고야 말겠다고 아무로에게 사자비의 양팔을 휘두르다니. 나는 도저히 이 샤아가  5년전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샤아를 더 이상 좋아하지 말라는 감독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죽어라 아무로

 

퀘스 파라야라는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현시대 X~MZ 체계로는 분류조차 불가능할 수준인 지멋대로 천방지축인 성격의 소녀로, 그 행동의 동기가 매우 많이 납득이 어려운 탓에 건담 역사상 최고 발암 캐릭터 명예의 전당에 등극한 인물이 되겠다. 이 아이의 놀라운 뉴타입 능력을 간파한 샤아는 나는 너만 보고 있다는 식의 가스라이팅을 시전하여 퀘스를 뉴타입 병기로 육성한다. 이런 샤아에 반감을 가지게 된 규네이와 그녀를 구하려는 하사웨이는 그 익숙한 토미노 방식으로 희생된다 (죽는다는 의미는 아님. 그러나 대부분 죽음). Z건담이나 ZZ건담을 본 사람이라면 퀘스가 포우 무라사메, 로자미아 바담, 엘비 플 등 슬픈 운명을 맞았던 강화인간 히로인들을 뒤섞어 놓은 인물이고 상대역인 하사웨이에게 까미유와 카츠 등의 역할을 맡기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발암 소녀 퀘스 파라야

 

극의 큰 뼈대는 샤아가 지구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액시즈를 지구에 낙하시키려 하고 지구연방의 특무부대인 론도 벨과 아무로는 샤아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년 전쟁의 콜로니 낙하 '브리티시 작전' 설정을 가져다 쓴 것이다 (스타워즈 데스스타처럼 건담 시리즈의 사골 설정이기도 하다). 설정도 플롯도 재탕, 캐릭터도 재탕에 주연에게는 몹쓸 성격을 부여해서 어이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오고 이거 블랙코미디인가 생각이 드는데. 자기 작품을 통해 자기 작품을 부정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나 싶기도 하고, 당당했던 소년 영웅도 어른이 되면 다 찌질해진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걸 자기해체적 메타 영화라고 하던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이 영화를 토미노 감독 작품 중 최고다라는 평가를 남겼다는데 그런 의미의 해석이었을까.

 

이게 그 샤아란 말인가

 

사실 토미노 감독의 작품들은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 할지라도 연출이 매우 불친절하기로 유명하다. 어리둥절한 샤아와 아무로이지만 내가 이해 못한 그럴듯한 의도가 있었기를 쪼금 바래본다. 멋진 모빌슈트를 등장시켜 프라모델 판매 매출 확대에 기여한 것은 덤. 아 덤이 아닌가.


2025년 5월 7일 롯데시네마 수지 6관 19시 10분 D10
4K리마스터링 비스타비전 상영

Comments

Facebook Comments : Comment Moderation T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