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劇場版「鬼滅の刃」無限列車編, 2020)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형식과 내용의 양쪽을 만족시켰는가를 따져보게 된다. 한쪽이 훌륭하더라도 다른 쪽이 형편없으면 아무래도 전체적인 감상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한쪽이 아쉬움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다른 쪽이 너무 훌륭하여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으로 남는 영화들이 있다. 내용은 허술하거나 별 얘기가 없는데 형식적으로 촬영 기술의 극한을 보여준다거나 전에 없는 액션 연출을 이루어냈다거나 하는 경우 관객은 그 영상과 음향의 순간에 몰입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시네마적 체험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어트랙션 체험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영화들은 취향을 타기 마련인데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지적 체험이 아니라 평가절하한다면 그런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 영화로는 뭐가 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 이렇게 영화가 좋기는 더 어려운 조건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마무리되었거나 되고 있는 거대 서사 애니메이션 시리즈로는 진격의 거인, 주술회전, 그리고 귀멸의 칼날이 대표적이다. 나는 한참 뜨거울 때는 외면하다가 한물 지난 후에야 나혼자 열광하는 유형인데 귀멸의 칼날은 그나마 많이 늦지는 않았던 편인 것 같다. 귀멸의 칼날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것은 2021년 1월 극장판 무한열차편이 한국 개봉했을 때였다. 역병으로 인한 거리두기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영관은 계속 확대되었고 (최종 215만명, 역대 한국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5위), 영화 커뮤니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전하는 평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평을 보게되면 장르 불문 극장 방문을 해야 하지만 당시 상황 상 나는 극장에 갈 수 없었고 성격상 배경이 되는 이전의 이야기를 모른 채 가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넷플릭스에 TVA 전편이 올라와 있었다.
TVA 무한열차편은 TVA 1기 26화 이후 시점의 이야기로 2020년 극장판으로 먼저 공개된 이후에 2021년 TVA 7화 분량으로 재편집하여 공개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극장판보다 TVA를 먼저 보게된 셈인데. PC 모니터로 이 무한열차편을 보고선 벅찬 가슴에, 조금 과장하면, 잠을 잘 수 없었다. 50대의 가슴을 이토록 두근대게 할 수도 있구나, 왜 커뮤에서 그 난리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혼잣말을 했다. 당시 나의 한줄평은 '긍지있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극장판이 재개봉한다면 대형화면과 박력넘치는 사운드로 쿄쥬로와 아카자의 대결을 반드시 다시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은 메세지나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 아쉬움이 있다. 대사를 주로 사용해야 하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고 15세 이상이라는 연령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한열차 극의 결말 부분, 울분이 담긴 탄지로와 친구들의 대사는 지나치게 설명적이어서 신파를 위해 의도적으로 넣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수 밖에 없었다. 애니메이션이니까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작품의 혈귀들은 죽어가면서 자기 사정을 징징대는 대사를 읆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도 볼때마다 짜증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노스케와 젠이츠 등의 지나치게(?) 개그 코믹스러운 연출은 이런 장르에 유지되어야 할 톤을 깨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별로지만, 이건 이런저런 여건 상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열차의 사건을 정리한 직후 귀살대 최강자 9인 중 한명인 炎主 쿄주로와 혈귀 上弦의 參 - 아카자의 대결이 벌어진다. 잘라도 바로 재생되며 초월적인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내며 무엇보다 영생을 사는 사실상 신과 같은 육체를 가진 혈귀와 맞서는 나약한 인간으로서, 네가 강하게 태어난 이유는 약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사무친 아들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혈귀로부터 제자들과 사람들을 지키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귀살대 주의 한 명으로서, 영화는 그 격렬한 대결의 과정을 통해 쿄주로의 이야기를 한다. 프레임을 쥐어짜내는 듯한 제작사 ufotable 특유의 액션 연출은 이 대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며 하드락 기반의 웅장한 OST는 그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렇게 보니 쿄주로의 이야기는 나름 괜찮은 방식으로 연출된 것 같네.)
이하 스포일러
적의 압도적 강함에 육체의 한계에 다다른 쿄쥬로는 아카자의 목을 베기위해 마지막 힘을 끌어 모은다. 화염의 호흡 9형, 오의 '연옥'. 왼손으로 적의 왼팔을 잡고 꿰뚫린 몸으로 적의 오른팔을 잡아 움직임을 봉쇄한 후 오른팔로 아카자의 목을 베어 나간다. 여유가 넘쳤던 아카자는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극의 끝은 탄지로에게 전하는 쿄쥬로의 말로 정리된다. "가슴을 펴고 살아라.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함이 온몸을 짓눌러도, 마음을 불태워라." (그래도 유언이 너무 길어...)
염주의 긍지높은 태도와 마지막 대사는 중년의 마음조차 불태워버렸다. 그랬기 때문이다.
대형 스크린과 극장 사운드의 효과는 과연 기대할만 했고, 상영관의 많은 사람들도 마음이 불타는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나약해질때마다 무한열차편을 봐야겠다.

2025년 5월 18일 CGV 동탄 8관 9:00 D8
비스타비전 상영
재개봉일이 5월 10일인 것을 잊고 지내다가 문득 확인하게 된 어제. 살펴보니 상영관이 몇 개 없었다. 미션임파서블 9편이 개봉한 상태라 그런건지 원래 상영관 확보를 안한 건지. 오늘 일요일 상영관을 찾다가 120석 규모의 CGV 동탄 8관을 선택했다. 200석 이상 규모에서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애초에 없었을 지도. 이 8관은 스크린이 다소 높게 설치되어 있어 D열에서는 꽤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보고나니 더 큰 스크린이 아쉬웠다.